"죽음의 땅이 된 미래의 지구. 기형인간들을 말살하고 신인류를 복제생산해 달로 이주시키려는 지구연방대통령과 극좌환경단체인 지구권리군이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테러의 한가운데 에밀레 신화의 종을 재창조해 테러와 오염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정크맨'."

'경멸'과 '햇빛 자르는 아이'로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몇개 받은 젊은 감독 김진한과 제작자 강성규씨가 준비하는 새 영화의 시놉시스(간략한 줄거리)다. 예상되는 제작비는 20억원. 15억원은 모았고 나머지 5억원이 문제다. 그간 여러 투자자를 물색해 새 영화에 대한 소개를 하고 힘겹게 돈을 모아온 터. 남의 돈 얻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투자자들이 모이는 곳은 없을까? 공식적으로 브리핑하고 투자받아 영화 제작에만 전념하면 좋을텐데.

반대 입장도 마찬가지다.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은 투자자들이 있다해도 믿을만한 영화를 찾지 못해 돈을 다른 사업으로 돌리곤 한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기만 하면 시장이다. 벤처기업의 IR(기업소개)이나 벤처 인큐베이팅사들의 투자설명회 같은 공개적 행사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김진한 감독의 '정크맨'제작팀은 여기 부산을 찾았다. 부산영화제(집행위원장 김동호)가 바로 영화 비즈니스의 훌륭한 시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산 출신 11편 국제대회서 각광

제5회를 맞은 부산영화제는 이제 아시아 영화의 기대주들이 모여 세계로 떠날 채비를 하는 항구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서울보다 더 심한 교통체증, 불편한 극장 시설, 예약 시스템의 혼란 등 부산 지역의 물리적 약점과 주최측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부산영화제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충무로 영화인들과 부산 시민들이 남포동 극장가로 몰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포동의 인파를 헤치고 나와 인근 코모도 호텔에 들어서면 부산영화제를 움직이는 숨은 힘을 발견한다. 3년전부터 기획단계에 있는 아시아 각국의 작품을 지원하고 제작자와 투자자들을 중개해온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수석운영위원장 정태성)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올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순환', 같은 영화제 넷팩상을 수상한 중국 지아 장 커 감독의 '플랫폼', 올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은표범상을 수상한 홍콩 프루트 첸 감독의 '리틀 청' 등이 모두 부산의 관심을 끌고 나가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PPP의 열매들이다. 남포동에서 상영되는 2백여편의 영화중 '부산발 세계행' 여행을 떠났다가 금의환향한 영화가 무려 11편. 적어도 아시아 영화에 관해 부산은 칸이나 베니스 못지않은 브랜드가 될 수 있다. 부산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PPP에서 지원금을 받은 작품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수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그리고 그들은 부산영화제로 돌아와 한국 관객과 세계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다시 세계로 나간다. PPP가 지원하는 상은 7개 부문 1억여원에 불과하지만 3년 공을 들여 국제적인 작품들을 배출해놓으니 'PPP 공인'을 받은 작품들은 자연스레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상근 코디네이터 채수진씨는 "여러 국제영화제를 거치며 참여의사를 밝히는 국제적 프로듀서들이 늘어나 부랴부랴 출입카드를 지난해의 2배나 만들어 놓았는데도 영화제가 시작되자 마그네틱카드가 떨어져 발급을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며 주최측도 놀랐다는 표정이다. 올해 ppp엔 해외 100명, 국내 200명의 영화 제작 관련 인사들이 참석했다. 빔 벤더스, 이와이 슌지, 프루트 챈 등 유명한 감독들이 부산에 와서 언론 인터뷰를 하고 영화나 보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다. 영화인들의 관심은 언제나 다음 프로젝트다. 유명인사들의 방한은 PPP가 이런 갈증을 해소할 시장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특히 미국의 미라맥스와 파인 라인 픽처스, 프랑스의 카날 플뤼스와 MK2, 일본의 NHK, 쇼치쿠, 오메카 프로젝트,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 등 메이저 투자자들의 참석으로 ppp는 국제적인 영화시장의 가능성을 높였다.

아시아 영화 1백여편 중 11개국 22편의 프로젝트가 선정돼 3일간 투자자들과 만나는 자리가 이뤄졌다. 프로젝트마다 20건에서 1백여건에 이르는 투자 상담이 몰려 삼일 간 총 미팅 성사 수가 250건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투자자들에게 가장 인기를 끈 프로젝트는 30여건의 미팅을 성사시킨 로예의 '여름 궁전', 이미 제1회 PPP의 경험이 있는 로예는 시종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다음으로는 송일곤의 '칼'. 송감독은 단편 '소풍'으로 칸영화제에서 단편부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해 국제적으로 알려진 감독이다. 제작자는 이스트필름(대표 명계남)으로 카날 플뤼스사에서 50% 이상의 자본을 대겠다는 제안을 내놓은 데다 NHK는 공동제작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릭 와이의 '부산 이야기', 차이 밍 리앙의 '흑안권', 장밍의 '주말 음모', 케네스 비의 '해남 치킨 볶음밥'이 모두 25회의 상담을 했다. 중국의 장밍감독과 인도의 샤지 카룬은 프랑스의 옵세르바뙤르의 필립아브릴과 공동제작 딜메모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 프로젝트 5건은 모두 높은 투자미팅 신청을 받았다. PPP측에 따르면 투자자중 가장 인기있었던 회사는 미라맥스, MK2, 르 필름 옵세르바뙤르, 피라미드, 와일드번치/카날 플뤼스, 에드 비탐 순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국가간 공동제작 시험 무대로

그 밖에 이와이 순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중국 클라라 로 감독의 '인공새'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중국 유 릭 와이 감독의 '부산이야기'도 상담 건수가 많았다.

프랑스 르 필름 옵세르봐뙤르의 필립 아브릴사장은 올해 칸영화제에 한국영화 4편이 출품된 것을 예로 들며 "한국 영화의 신세대가 전면으로 부상했다"고 진단했다.

'아시아의 창'으로서 부산영화제는 아시아 국가간 공동제작의 시험무대로도 떠올랐다. 한국 튜브엔터테인먼트는 일본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투자를 했고, 한국 디지털 네가는 일본 하라다 마사토 감독의 '피스톨레로'를, 일본 오메가 프로텍트,홍콩 어플로즈 픽처스,한국 싸이더스는 공동으로 허준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제작한다. 한국 시네마서비스는 일본 쇼큐치와 '순애보'로 뭉쳤다.

영화제에 투자자가 몰려들기 시작하면 비로소 영화 상품을 사고파는 견본시가 형성된다. PPP가 만원을 이룬 덕분에 한국영화는 부스를 차리고 수출 상담에 나설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배급사 시네마서비스는 SF 무협액션 '비천무'와 공포영화 '해변으로 가다', 그리고 부산영화제 공식 상영작인 '시월애'로 라인 업을 갖추고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소방 액션 '리베라 메'까지 프리(PRE) 마케팅 시장에 내놓았다. 온라인 해외마케팅 시스템까지 갖춘 씨네클릭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의 스타였던 '박하사탕'과 여균동식 포르노그라피 '미인', 그리고 미개봉작 '청춘'과 '공포택시'를 선보였다. 그 밖에 독립영화 전문 배급업체인 인디스토리, 해외세일즈 전문회사 미로비전과 손에손필름,영화진흥위원회 등 모두 6개 영화사에서 한국영화 부스를 차리고 해외 세일즈에 나섰다. 해외영화제의 필름마켓처럼 PPP는 '인더스트리 스크리닝'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작품성과 흥행성을 갖춘 한국영화들을 해외배급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상영했다.

●한국영화도 본격 수출상담

'초록물고기','행복한 장의사','아나키스트'처럼 개봉후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작품에서 '비천무','동감','플란다스의 개','가위','해피엔드','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해변으로 가다','반칙왕' 등 최근 개봉작들도 포함되어 있다. '청춘'같은 미개봉작은 프리 마케팅으로 눈길을 끌었다. 홍콩 골든 하베스트, 일본 가가 커뮤니케이션, JVC 픽쳐스 등 아시아의 유력 배급사들이 사전에 참가 의사를 밝혀 계약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일즈 에이전트들은 하루 평균 15-20건의 구매상담을 한 것으로 주최측은 집계했다. 튜브엔터테인먼트의 '가위'는 홍콩의 한 영화사가 4만5천불에 구매제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이건상 부장은 "다른 마켓과 달리 한국영화가 중심이어서 효과가 크고, 바이어 뿐 아니라 국제 영화제 관계자들까지 부스를 찾아 한국영화에 대한 프로그래밍을 결정해 실질적인 성과가 있었다"며 "칸 마켓과 밀라노 마켓사이의 중요한 마켓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영화가 아시아권에서 상품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실제 계약고와 상관없이 ppp는 이미 아시아 영화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아시아 영화에 관한한 도쿄나 홍콩이 아닌 부산이 영화 마켓의 메카가 된 것이다. 관객과 배우들이 북적거리는 영화제 극장골목이 아니라 인근 호텔에서 열린 영화 시장이 부산영화제의 숨은 성과다. 이제 아시아가 부산에서 뭉쳤으니 다음 프로젝트는 유럽으로, 할리우드로 진격하는 것이다.

제3회 PPP 수상작

(시네마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