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브뉘엘에 관한 짧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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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브뉘엘에 관한 짧은 초상 :::

이윤형 | 2000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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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죽음이다

루이 브뉘엘과 까뜨린느 드느브

루이 브뉘엘(이하 루이스 부뉴엘)은 자서전 《나의 마지막 한숨 My Last Sigh》의 첫 장을 '기억'으로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는 죽기 10년 전부터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고 심지어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부뉴엘은 그 순간 인간의 삶에서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부뉴엘 자신도 70세가 되자 조금씩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은 물론 조금 전에 한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손에 5분간이나 라이터를 들고 라이터가 어디 있는지 찾아 헤맸고,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여섯 달 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을 점점 잃어가면서 부뉴엘은 기억이 사람의 삶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표현하지 못하는 지성이 실제로 지성이 아니듯이 전혀 삶이 아니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의 일관성, 우리의 이성, 우리의 느낌, 심지어 우리의 행위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기억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다. 부뉴엘은 "우리의 상상과 꿈이 기억을 끊임없이 습격하고, 우리가 판타지의 사실성을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종종 거짓을 진실로 변형한다"고 말한다. 기억은 의심스럽다. 하지만 부뉴엘은 판타지와 현실이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진실과 거짓, 확언과 주저, 반복과 생략, 그 모든 것들이 기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이런 기억의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에로티시즘, 종교, 죽음의 3위 일체

루이스 부뉴엘은 1900년 2월 22일 스페인 아라곤 남쪽 테루엘 지방의 조그만 마을 칼란다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칼란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도 계속 중세시대라고 불릴 만큼 옛 전통을 고수하던 마을이었다. 부뉴엘은 중세적인 분위기에서 지낸 어린 시절의 두 가지 근본적인 감정이 에로티시즘과 죽음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어린 시절을 거의 중세적인 분위기에서 지냈다. 나는 여기서[자서전] 내 어린 시절의 두 가지 근본적인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믿음에서 승화된 깊은 에로티시즘과 죽음에 관한 영속적인 의식이다 (…) 그것은 매우 스페인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스페인의 예술, 스페인적인 정신은 이들 두 감정들로 충만해 있었다."

당시 어김없이 울리던 성당의 종소리는 사람들의 삶의 지표와도 같았다. 미사 시간, 저녁기도 시간, 삼종기도 때 어김없이 종이 울렸다. 마을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와 사람이 죽었을 때 또한 마을의 종이 울렸다. 부뉴엘은 그런 종소리를 마음속에 평생 간직했다.

부뉴엘은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신비한 힘을 지닌 칼란다의 북소리를 인상깊게 기억한다. 칼란다의 북소리는 성(聖)금요일 정오에서 토요일 정오까지 쉼 없이 울렸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순간, 즉 지진, 암석의 붕괴, 신전의 장막의 파괴뿐만 아니라 세계를 뒤덮은 어둠의 그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뉴엘은 이 소리에 깊은 감화를 받았지만, 정작 무엇 때문에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 또 그런 종류의 느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세계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이 비밀스런 리듬이 합리적인 정신을 좌절시키면서 거대한 전율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느꼈고, 나중에 이러한 음울한 리듬을 <황금시대>와 <나자린>에서 사용한다. 그는 또한 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면서 들판에서 까마귀들이 죽은 당나귀를 파먹는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어린 부뉴엘의 눈에 까마귀들의 모습은 검은 법의를 걸친 굽은 등의 사제들처럼 보였다. 사춘기 때 부뉴엘을 자극한 가장 강렬한 경험은 이런 죽음과의 대면이었고 종교적인 분위기였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오랫동안 내게 친밀한 것이었다. 성주간(聖週間) 동안 칼란다의 거리를 통과하는 해골들을 본 이래로, 죽음은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나는 결코 죽음을 잊거나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에밀리오 리에라는 루이스 부뉴엘이 20년간의 멕시코 생활을 마감하면서 만든 <비리디아나>를 평가하면서 이 영화가 예외적인 풍부함과 밀도를 지니는 이유가 단지 스페인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비리디아나>는 스페인적인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부뉴엘에게 스페인이 어떤 구체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리에라는 부뉴엘 영화의 주제인 '에로티시즘, 종교, 죽음의 3위 일체'가 그의 스페인적인 특성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부뉴엘의 테마는 카톨릭주의의 특정한 한계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페인적인 카톨릭주의가 지닌 특정한 한계에서만 단지 이해할 수 있다 (…) 부뉴엘의 스페인적인 특징이 그의 영화에서 종교적인 테마가 계속 존재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 부뉴엘의 영화는 육체의 태형과 고뇌를 묘사하고,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비정상적인 에로티시즘, 매저키즘, 그리고 페티시즘이라는 난폭한 극단을 초래하는가를 묘사한다."

부뉴엘은 명백히 기적을 믿었지만, 카톨릭 교회가 단지 기적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인간에게 절대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합리주의의 세속적인 믿음을 경계했지만 불가지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비록 평생을 무신론자로 지냈지만 결코 신을 조롱하거나 모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리에라가 지적하듯이 신을 조롱하거나 모독하는 것은 신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이상화하거나 모독하는 것은 도그마적인 태도의 양극일 뿐이다. 부뉴엘은 그런 점에서 신을 모독하거나 조롱한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비판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 십자가에 침을 뱉는다면 십자가가 지닌 신성한 아우라는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십자가가 원래 의도된 것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성한 아우라를 상실한다."

초현실주의자의 도덕

부뉴엘은 고등학교 때까지 예수회 학교에서 엄격한 교리 교육을 받았다. 1917년 마드리드 대학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부뉴엘은 삶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그는 대학에서 친구들과 함께 문학과 시에 대해 토론했고, 살바도르 달리와 만나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부뉴엘과 달리는 영화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코미디를 좋아했고, 특히 버스턴 키튼에 대해서는 시를 쓸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예술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영화를 평민들이나 하는 서커스로 취급했고 예술로 생각하지 않았다. 1928년 부뉴엘이 <안달루시아의 개>를 만든다고 어머니께 말하자 그녀는 절망적으로 통곡했다. 부뉴엘의 말은 "어머니, 전 서커스에 들어가서 광대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점차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자 부뉴엘은 파리에 가고 싶어했다. 부뉴엘은 1925년 당시 세계 예술의 수도였던 파리를 학생 자격으로 방문한다. 그는 파리의 자유스런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고, 영화에 매료되었다. 파리에서 그는 하루에 3편씩 영화를 보았고, 《카이에 다르 Cahiers d'Art》에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과 에리히 스트로하임의 <탐욕>에 대한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이었다. 그는 이 영화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다. 파브스트의 영화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마지막 웃음>에도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가장 그를 자극한 것은 프리츠 랑의 <운명>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죽음의 형상에 강렬한 느낌을 받았고 자신도 역시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은 확고했지만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우연히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장 엡스탱이 운영하는 배우 연기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를 찾아갔다. 부뉴엘은 조수이자 실습생으로 영화 작업에 참여하며, 엡스탱의 <어셔가의 몰락>(1928)의 조감독을 했다. 그를 눈여겨본 엡스탱은 어느 날 "아벨 강스가 영화를 만드는데 같이 일할 생각이 없냐"고 그에게 제의했다. 부뉴엘은 "나는 당신의 조감독이지 아벨 강스의 조감독이 아닙니다. 난 그와 작업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부뉴엘은 <나폴레옹>을 제외하곤 아벨 강스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벨 강스는 잘난 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엡스탱은 부뉴엘에게 위대한 감독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화를 냈고 "초현실주의자들을 조심해, 그들은 미쳤어"라고 말했다.

부뉴엘은 당시 초현실주의에 빠져 있었지만 그 어떤 집단에도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초현실주의 집단에 참여한 것은 <안달루시아의 개>가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후였다. 이 영화의 출발은 기괴한 경험에서 시작했다. 어느 날 부뉴엘은 달리와 우연히 만났다. 달리는 손에 개미가 득실거리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고, 부뉴엘은 눈을 베어내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달리는 이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섞어 영화를 만들자고 제의했다. 둘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이미지들, 관념의 자유연상에 기초한 이미지들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정신에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를 받아들였고, 반면 문화나 교육에서 나온 이미지들은 체계적으로 거부했다. 달리와 부뉴엘은 자신들을 놀라게 하는 이미지들이 또한 관객들을 놀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여자가 자신을 공격하려는 남자를 피하기 위해 라켓을 움켜쥔다. 그때 남자는 다른 게 있는지를 살펴본다. 달리와 부뉴엘은 이 장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했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가 뭘 보지?" "날아 다니는 개구리." "그건 별로야." "코냑 한 병." "그것도 별로야!" "그래 좋아, 난 두 개의 로프를 본다." "좋군. 로프 다음엔 뭐가 오지?" 등등. <안달루시아의 개>는 논리 그 자체를 거부한 영화였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단지 불쾌감, 감동, 매혹을 주는 이미지들을 선택하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부뉴엘은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일종의 혁명을 원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혐오하던 사회와 투쟁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총 대신 '스캔들'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억압적인 체제의 모순과 치부를 폭로하기를 원했다.

"우리 모두는 특정한 혁명의 지지자였다. 비록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이 경멸하는 사회와 대항해서 싸웠다. 주된 무기는 물론 총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캔들이었다. 스캔들은 착취, 식민지적 제국주의, 종교적 폭정과 같은 사회적 범죄, 부르주아의 위선 등 파괴되어 마땅한 체제의 모든 은밀하고 추악한 것들을 폭로할 수 있는 유력한 힘이었다 (…) 초현실주의자의 목표는 새로운 문학, 예술, 심지어 철학적인 운동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질서를 파괴해, 삶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스캔들'의 혁명적인 힘은 그의 두 번째 작품 <황금시대>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1930년 10월. 이 영화가 상영된 '스튜디오 28'에 모인 관객들은 흥분한 나머지 사제 폭탄을 터뜨리고 화면에 보라색 잉크를 뿌리고, 극장 로비에 전시된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찢어 버렸다. 파시스트, 반유태주의자, 극렬 보수주의자들, 우익 성향의 신문들, 카톨릭 성향의 단체들은 이 영화의 부도덕성에 대해 성토했고, 그해 12월 이 영화는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황금시대>가 거대한 스캔들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부뉴엘은 나중에 초현실주의가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초현실주의는 실패했다고 믿고 있다. 초현실주의가 문화와 예술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확실하지만, 초현실주의자의 진정한 목표는 문예사의 연대기에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세계를 변혁하지 못했고 단지 세상에서 작은 자리만을 차지할 뿐이며, 이제는 문예사 연대기에만 이름을 남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부뉴엘은 <황금시대> 이후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한다. 하지만 그에게 초현실주의 그룹과 함께 한 파리 시절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의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