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지망생] 장정숙씨의 경우
글: 윤상열
2000년 10월 10일
생을 사는 하나의 방법, 이렇게 한 여자는 걸어갔다
그녀의 생의 충만한 알갱이는 언제나처럼
그녀 곁을 맴돌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의 문제, 소유의 문제와는
별개로 진행되었던 삶의 문제를 안고 이십 사 년 동안
평범하게 주위의 관심을 만족시키며 살아오고 있었다.
1. 96년 봄 대구 - 졸업하고 나서의 문제
의상디자인과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진로는 마음먹은 대로 펼쳐지질 못했다. 물론 같은 과를 나온 여타의 동기들도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진로에 대한 고민은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대구가 섬유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가기 시작할 무렵 이였으므로 산학연계로 그 설립의 취지를 다지던 의류계통의 과들 또한 된서리를 맞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또 한가지 핸디켑은 그녀 자신 스스로 자기분야에 대한 직접적인 욕망이나 호기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 이였다. 그것은 직업인으로서 가져야할 깊은 소명의식과도 동떨어진 방관에 가까운 자기홀대였다. 이것은 그녀가 임시직으로 수용했던 학습지선생님이라는 직함만 보아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 이였다. 직장에 대한 망설임이 가득히 자리잡던 이 시절에 그녀에게 가장 큰 위안을 주었던 것은 바로 친구들과의 만남이였다. 그것은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들만의 우정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것 이였다. 서로에게 깊은 의지와 신뢰를 주며 안주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막내로 자라 온 그녀에게 있어 커다란 희망이며 자신을 지탱해주는 머릿돌 역할을 해 주던 핵심 이였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 이였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도 하나 둘씩 다른 이성이 생기고 그녀의 쉴 곳은 좁아져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서 버림 받은 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여겼다. 더욱이 이 작은 도시 대구에서는 말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 볼 수 없는 어떤 먼 곳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고 약간의 돈도 필요했다. 그 두 가지를 모두다 얻을 수 있고 발산할 수 있는 곳. 그곳은 서울 밖에 없었다.
2. 97년 여름 서울 - 세기연기학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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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꿈을 키워가는 장정숙씨 |
3. 98년 봄 구로청년회 - 내 인생의 분기점
'영화라는 공통분모가 그 자리의 활력소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영화라는 거대한 유령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면서 자신과 자신 주변에 낯설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급속하게 친밀해 질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 내게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녀가 그곳에 첫 걸음을 했을 때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에 관한 그녀의 노력 여부를 묻는 질문들 뿐 이였다. 그것은 그녀가 그곳에서 만난 김홍준 감독과 정성일씨 허진호 감독들에게서도 동시에 나타나는 카테고리였다. 영화를 공부한다는 것과 영화를 즐긴다는 것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영화를 알아가게 되면서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도 동류항을 지닌 사람들과의 모임들이 그곳에서 계속되면서 그녀는 영화를 얘기한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영화를 하고 싶다는 강한 자극을 받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영화에 어떻게든 다가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키 위한 모든 조건들이 그곳에서 충족된 결과였다.
4. 99년 봄 김기덕 감독과의 만남
구로청년회에서 시나리오 강좌를 맡았던 김기덕 감독은 그녀에게 영화를 할 수 있게 해 준 첫 단초를 제공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인생의 이정표에 특별한 존재로 남아 있는 사람이였다. 강의가 끝난 후 항상 가져왔던 술자리에서 그녀는 김기덕 감독의 사람다움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보아왔던 김기덕 감독의 작품들에서 풍기던 색채미를 자신의 이력과 결부시켜 아주 특별히 생각해 오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김기덕 감독과의 그런 자리가 너무나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는 개인적인 사석의 자리가 아닌 여러 영화제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고 더욱더 친근하게 그와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또한 사람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서인지 자신을 기억해 주는 김기덕 감독의 따뜻함에 고마움을 자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김기덕 감독의 첫 인상을 '청순한 아이 같은 이미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일탈적이고 뭔가 비상식적인 사람들과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는 말을 덧붙여서 이어 주었다. 아트선재센타에서 있었던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에서 그녀는 또 한 사람과의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되는데 바로 <햇빛 자르는 아이>를 연출한 김진한 감독으로 그에게서 그녀는 영화에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조언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관객으로서의 자세를 기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김진한 감독으로부터 그녀는 충무로 생활에 대한 버거운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녀는 끝까지 믿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것은 그녀가 김기덕 감독과 김진한 감독과의 조우를 통해 스스로에게 내내 물어 보았던 그 물음에 대한 자기 자신의 확고한 대답이였을 것이다.
5. 2000년 실제상황 - 그녀 인생의 실제상황이 되버린 영화 앞에서
씨네21에 게재되었던 김기덕 감독의 <실제상황> 스텝 모집 광고는 그녀의 뒤바뀐 삶의 경로를 실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리라 그녀는 생각했다. 신승수 프로덕션에서 제작하고 면접을 주관했으나 그녀는 보기 좋게 면접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무런 경력도 없었고 내세울 만한 조건도 갖추지 못했던 것이였다. 있었다면 다만 영화에 대한 풋풋한 열정이었다. 그런 것이 현장에서 통용되리라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도약을 꿈꾸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였다. 그녀는 김기덕 감독과의 면담을 통해 각 시퀸스별 감독 산하에 연출부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떳떳한 입장은 아니였지만 첫 발을 조심스럽게 내 딛은 것으로 그 의미를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고 했다. 마로니에 공원 씬을 담당한 권기환 감독 밑에 참여했던 그녀는 자신의 전문성을 더욱 필요로 하는 곳이 필요했고 김기덕 감독 밑에 총연출부 미술부에서 실제상황 제작을 함께 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꿈꾸었던 먼 이상에 대한 실현이며 동시에 항상 상상으로만 그녀의 주위에 이웃했던 영화라는 페르소나를 자신의 인생의 실제상황으로 등장시키면서 자신이 이제 직접 페르소나의 옷을 입게 되었다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첫 공연물이라는 의의를 잊지 않겠다고 얘기를 남겨준다.
장정숙씨는 우리 주위에서 평범하게 대할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또한 그녀는 영화를 미치도록 사무하는 매니아 수준의 광적인 열정을 지니지는 않았다. 다만 인생을 멋지게 설계하고 자기 자신이 살아갈 수 있다는 모습을 영화라는 평범하지 않은 매체를 통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려 나갈 수 있다는 점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의 나이는 28살이다. 결코 여자로서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영화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남들이 선호하는 연출이 아닌 미술감독이라는 의외의 진로로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고집이라는 단어가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예기를 남들로부터 참 많이도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마도 영화를 자신의 나이또래 여성들이 즐기는 그런 오락의 한 부산물로 밖에 여기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삶에 영화라는 거대한 내용물을 안고 살아갈 거라 다짐한다. 이제는 자신이 그 거대한 내용물의 부속물이 아닌 소유주가 되었다는 충분한 공감대가 자신의 인생속에 녹아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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