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지막 주는 아카데미의 주다. 칸느나 베를린처럼 국제 영화제도 아니고 우리의 대종상처럼 그저 미국내의 행사일 뿐인 아카데미 영화제를 가지고 웬 호들갑인가하고 따질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미국영화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아카데미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수상여부가 전세계 배급이나 흥행에 영향을 끼친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뉴 밀레니엄 시대에 처음 열리는 아카데미의 결과에 따라서 향후 세계영화사의 흐름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올해로 72회째를 맞이하는 아카데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우선 예년과 달리 화제작 우선 위주가 아니다. 예컨대 지난 70회 때 11개 부문을 싹쓸이했던 <타이타닉>이나 71회 때 7개 부문을 휩쓸었던 <셰익스피어 인 러브> 같은 화제작이 없다는 말이다. 요컨대 상업성에 치중한 대작오락영화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B급 오락영화들의 범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아카데미 시즌을 맞이하여 한창 노미네이션에 들떠 있는 영화들 가운데 오락성과 대중성으로 승부를 거는 영화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는 거다. 대신 일정한 수준에 오른 수작들이 박빙의 혈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미 사상최고의 오락영화로 자리 매김 된 <타이타닉>같은 영화가 아카데미 마저 휩쓸어 이제 더 이상의 작품성을 겸비한 대작영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이 영화 한편으로 할리우드는 상업성의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이제 하향곡선을 그리던가 우회로를 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셈이다. 물론 할리우드는 언제라도 블럭버스터로 귀환할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다. 여름 시즌을 겨냥해서 말이다.

아카데미에 후보에 오른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할리우드가 모종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영화의 러닝타임이 전보다 훨씬 길어졌다는 점이다. 3시간이 넘었던 <타이타닉>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요즘 왠만하면 두 시간은 기본이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5편의 영화들 가운데, 샘 멘데스 감독의 <아메리칸 뷰티>는 러닝타임이 121분이고,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그린 마일>은 무려 181분에 달한다.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는 160분이다. 남우조연상 후보(주드 로)에 오른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는 140분이다(불행히도 국내상영 때 10여분이 잘려 나갔지만). 보통 극영화들의 러닝타임이 100분 내외라고 할 때 기준초과임을 알 수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미국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풍요로운 경제 성장을 누리고 있다. 그만큼 삶에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다. 덕분에 영화를 볼 시간도 넉넉해졌음을 반영하고 있다.

아카데미를 주목하게 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소재의 다양성에 있다. 소재를 선택하고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다섯 편의 영화들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아메리칸 뷰티>의 주제를 파격적이다. 외관상 평온해 보이는 한 중산층 가족이 그 근저로부터 붕괴해 들어가는 과정을 섬뜩하리 만치 치밀한 관찰자 시점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미국 신화에 대해 내부로부터의 가치전복을 꾀하고 있는 이 작품에 보수적인 아카데미마저 손을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니컬한 감수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영화가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예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1994년 <쇼생크 탈출>로 스타덤에 오른 시나리오 작가 출신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과 원작자 스티븐 킹이 다시 뭉쳐 만든 <그린 마일>은 인간이 만든 사법제도와 종교적 섭리 사이에 놓여있는 괴리감에 주목한다. 눈에 보이는 실증적인 증거를 최고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인간의 제도와 오로지 믿음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삼는 하나님의 왕국간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흑인을 일종의 구세주처럼 설정한 것도 눈 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인사이더>는 거대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언론의 기만성을 폭로한다. 그것도 가상공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명비판을 통해서 말이다. 특히 이 영화는 좌파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60년대 서구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정신적 지주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CBS의 PD 로월 버그먼(알 파치노)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중심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덴젤 워싱턴 주연의 <허리케인 카터>와 힐러리 스웡크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소년은 울지 않는다>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다. 전자는 인종차별주의에 맞서는 한 흑인의 눈물겨운 석방투쟁을 다루고 있고, 후자는 왜곡된 성적 편견에 의해서 무참하게 희생된 남장여자 브랜든 티나의 비극적 삶을 그리고 있다.

미국내에서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필두로 외국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이탈리아영화 <아름다운 인생>, 독일영화 <롤라 런>을 비롯해 성룡의 액션영화 등 과거 어느때보다도 더 활발하게 미국 내에서 문화의 다양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메리칸 뷰티>의 승리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미국 사회를 다시 제대로 바라보려는 작은 시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