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역사를 저격하라 <2009 로스트 메모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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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역사를 저격하라 <2009 로스트 메모리즈> :::

기선민 | 2002년 01월 24일
조회 2244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현란한 연출 돋보여

사카모토(장동건)와 우정을 나누지만 결국 등을 돌리는 사이고(나카무라 토루).

암살을 기도한 한 발의 총알이 빗나갔다고 가정하자. 말하자면 '실패한 거사'다. 그런데 그것이 일제의 조선 강점 당시 조선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를 노린 안중근 의사의 총알이었다면? 목숨을 건진 히로부미의 주도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는 우를 범하는 대신 연합군의 편에 섰다면? 그래서 서기 2009년에도 여전히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 아래 있다면?

복거일의 소설 『비명(碑銘) 을 찾아서』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설정은 황당무계할 정도로 도발적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대신 베를린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승전국 일본은 승승장구해 1988년 나고야 올림픽에 이어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기에 이른다. 경성(서울) 의 한복판에는 이순신 장군 대신 히로부미의 동상이 세워지고 축구선수 이동국은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다.

주인공 사카모토(장동건) 는 조선계 일본인으로 일본 연방수사국(JBI) 의 정예 요원이다. 조선계라고는 하지만 "스시(초밥) 만 보면 자다가도 달겨들고 김치는 매워서 질색하는" 갈 데 없는 일본인이다. 고아인 그에게 일본인 동료 사이고(나카무라 도오루) 의 가족은 혈육과도 같은 정을 나누는 특별한 존재다.

그에게는 JBI 요원이었지만 조선인 테러단체 '후레이센진(不逞鮮人) '과 내통하다 죽은 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명문가 이노우에 재단의 소장품 전시회장에 침투한 조선인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를 단순 테러 사건으로 축소하려는 상부의 입장에 의혹을 품게 된다.

테러리스트들이 전시된 유물 중 상고시대 제천의식 때 쓰이던 월령을 반출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카모토. 그는 월령의 입수 경위를 가리기 위해 이노우에 재단을 조사하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아들처럼 보살펴주던 다카하시 반장(신구) 을 살해한 누명을 쓰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리고 테러 단체가 훔치려던 월령의 정체가 과연 한.일의 과거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지를 밝히는 일이다. 아들에게 오명의 굴레를 씌웠던 아버지는 진실을 좇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다가서게 된다.

'대체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의 얼개는 결코 간단치 않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실패로 출발한 설정은 종반부에서 다시 한번 뒤집힌다. '만약 이렇다면…'이라는 가벼운 기분으로 보고 있는데 '그런데 사실은…'이라며 뒤통수를 치는 격이다.

전반부.중반부와 종반부는 따라서 진행 속도가 차이를 보임은 물론 장르가 바뀌는 인상까지 준다. 전반부가 배신.음모.의혹이 뒤얽힌 전형적인 액션 블록버스터라면 반전이 일어나는 후반부는 팬터지에 가깝다.

중국 하얼빈역 장면은 동일 장소.동일 인물로 이뤄진 마지막 장면과 멋진 대구(對句) 를 이루며 영화의 완성도를 한층 높인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이렇듯 '잘 차린 밥상'이다. 그런데 식사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맛봐야할 찬은 너무 많다. 두 나라 간의 '운명의 장난'을 소화하기도 벅찬데 민족주의로 인해 비극적 결말을 맞는 사카모토와 사이고의 우정에도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식이다.

스타일리스트를 지향함이 분명해보이는 신인 이시명 감독의 현란한 연출은 여기에 과부하를 건다. 우위썬(吳宇森) 의 '영웅본색'을 좋아한다는 이감독은 슬로 모션과 교차 편집, 그리고 장엄한 레퀴엠풍 음악을 신인답지 않은 능숙함으로 요리해낸다.

하지만 설정이 주는 부담이 너무 컸던 탓인지 그는 에피소드 위주로 벽돌을 한장씩 쌓는 듯한 정교한 직조술보다는 정공법을 택한 것 같다.

'쉬리'가 우리도 할리우드 못잖은 대형 액션물을 만들 수 있다는 장르적 기념비를 세웠다면 '공동경비구역 JSA'는 동시대성을 지닌 주제를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다는 작품성에 대한 기대치를 키웠다.

지난 한해 '조폭 영화'로 몸집 불리기에 성공한 한국 영화는 이제 두 성공 사례의 행복한 만남에 대해 고민해야할 때를 맞은 것같다.

제작비 86억원(순제작비 64억원) 을 들였다는 올해 최대의 기대작 중 하나인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그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12세 관람가. 2월 1일 개봉.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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