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다룬 옴니버스 영화 6人 6色
글: 라인지기
2003년 03월 13일
지난 11일 오후 서울 홍릉 인근에 있는 영화진흥위원회 시사실에는 2백여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 김문주씨도 자리에 함께 했다. 몸을 목발에 의지한 채 한걸음 한걸음을 힘겹게 옮겼으나 그의 얼굴은 환해 보였다. 그가 주연한 단편영화 '대륙횡단'이 처음 공개됐던 것이다.
극장의 불이 꺼졌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대륙횡단'을 시작으로 6편이 상영된 1시간 50분 동안 웃음과 슬픔이 교차했다. 제작 관계자를 대상으로 연 내부 시사회였으나 상영 순간에는 모두 평범한 관객으로 돌아갔다. 단편 여섯편의 필름을 갈아끼는 사이 나직한 박수 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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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 박찬욱.정재은.박진표.임순례 감독, 이진숙 프로듀서, 이현승 총감독 |
이날 선보인 영화는 '인권영화 프로젝트'(가제). 지난해 말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가 기획한 옴니버스 영화다. 자칫 국가기관이 만든 홍보성 영화처럼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제작에 전혀 간섭받지 않았다.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박찬욱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전혀 '관제'의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간 상업 영화계에서 등한시했던 우리 시대의 각종 모순을 돌아보게 하는 촉매가 될 것으로 보였다.
우선 감독들의 면면이 만만찮다. <이재수의 난>의 박광수, <세상 밖으로>의 여균동,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씨가 한데 모였다. 세대도, 색깔도 다른 이들 감독이 손을 잡고 우리 사회의 각종 차별을 구석구석 짚어본다는 점에서 기획 단계부터 주목을 받았다.
감독들은 이름값을 했다. 인권이란 단어에 덧씌워진 묵직함을 걷어냈다. 1980년대식의 운동권 영화가 아니었다. 이른바 계몽영화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감독들은 일상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또 대중의 눈높이를 의식한 듯 유머와 코믹한 상황을 섞어가며 공감대를 이루는 데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소재가 폭넓었다. 세종로를 목발로 걸어가려는 장애인(여균동의 '대륙횡단'), 이웃으로부터 격리된 성범죄자(정재은의 '그 남자의 사정'), 볼품없는 외모 탓에 취업을 못한 여고생(임순례의 '그녀의 무게'), 영어 발음 때문에 강제로 혀수술을 받는 어린이(박진표의 '신비한 영어나라'), 얼굴로 사람을 평가하는 직장인(박광수의 '얼굴값'), 정신병자로 몰려 6년 이상 병원에 수감된 네팔 여인(박찬욱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모두 나름의 색깔을 보였다.
각기 10~20분 분량의 짧은 영화지만 감독들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다양한 형식을 음미하는 맛도 쏠쏠했다. 열세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하거나(대륙횡단), 음산한 공포영화 분위기로 풀어가거나(그 남자의 사정), 배꼽 잡는 코미디를 재연하거나(그녀의 무게), 충격적 시사 다큐멘터리를 보여주거나(신비한 영어나라), 현실과 환상의 미묘한 긴장을 포착하거나(얼굴값), 얼굴을 숨긴 주인공의 시선으로 인권의 사각지대를 응시했다(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지난해 칸.베니스 영화제에서 각각 화제를 모은 <텐 미니츠 트럼펫>과 '2001년 9월 11일'에 견줄 만한 옴니버스 영화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 싶었다.
편당 제작 지원금은 5천만원. "사비 1천만원을 더해 네팔 현지까지 다녀왔다"(박찬욱), "배우.스태프들이 염가로 출연했다"(임순례)고 밝힌 데서 보듯 각 감독은 열의를 다했다.
이번 영화는 오는 5월께 개봉된다. 다음달 25일 개막하는 전주영화제 상영도 추진 중이다. "코미디가 판치는 요즘 감독들이 이런 말을 할 자리란 거의 없죠"(임순례),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아 참여했어요"(박진표)라는 말처럼 충무로의 빈 구석을 압축해 보여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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