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기적 영화와 의사소통의 영화 :::
양유창 | 1998년 09월 01일
조회 1843
유기적 영화와 의사소통의 영화
- 1편의 서문과 5개의 영화비평 -
<킹덤/Riget>
<증오/La Haine>
<해피 투게더/춘광사설/Happy Together>
<어딕션/중독/The Addiction>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5개의 영화평을 담은 이 글의 서문을 대신하여 나는 나의 영화에 관한 생각이 담긴 글을 적어보려 한다. 그것은 아주 소박하지만 나름대로는 깊고 꼼꼼한 연구를 요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영화를 응원하는 선언문처럼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은 그저 열어두고만 싶다. 문화 혹은 예술로써의 영화가 인간을 위해 정의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재현으로 출발한 영화가 몽타주와 미장센의 논쟁을 거쳐 장인과 작가를 구별해내기 시작한 것은 이제 단순히 영화를 찍고 짜맞추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고민을 멈추고 영화 만들기에 대한 성찰을 통해 영화를 예술로 승격시키기 위한 중요한 시도였다. 그에 따라 영화 속에 자신의 필적을 새기는 감독과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감독, 그리고 스스로 시나리오를 쓸 줄 아는 감독은 문학에서와 같은 '작가'로 부상하였으며, 그렇지 않은 감독들은 아무리 세인들에게 훌륭하게 평가받은 작품을 만들었더라도 평가절하되어 장인이나 사기꾼들로 분류되기에 이른 것이다. 작가주의에 관한 이러한 예술적인 고찰은 가치와 평가의 문화 속에서 비롯된 것이며, 영화의 모국 프랑스에서 비롯되어 전세계로 뻗어나가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는 B급 영화의 스타일리스트들이 작가로 승격되었고, 유럽에서는 대중적인 영화감독들이 버려지고 꾸준하게 자기 세계를 유지하는 감독들이 부상되었으며, 제 3 세계에서는 영화를 무기로 혁명을 부르짖은 감독들이 작가로 군림하여 서방선진세계에 소개되는 기회를 얻었다.
또한 작가주의의 발현은 이어 영화비평의 이론화 작업을 낳는 모태가 되었다. 프랑스의 [까이에 뒤 시네마]를 위시한 비평가들은 영화에 맑시즘과 기호학, 그리고 정신분석학 등을 도입하여 영화의 이데올로기, 관객성, 토대와 상부구조를 논의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그 작업은 영화로써 실천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렇게 영화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공동체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에게 영화를 무기로 이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폭압정권에 억압받는 지식인들, 부르주아 지배사회의 노동자들을 비롯해 페미니스트들과 흑인, 그리고 게이-레스비언 등 인권을 위해 그들은 한결같이 영화의 대중성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작가주의가 태동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작가주의는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이제 영화는 쌍방향 멀티미디어 시대에 고전적 매체로 뒤쳐지고 있으며, 영화예술을 하는 작가들은 여타 개인예술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처럼 고집이 세다. 그에 따라 새로운 영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물결처럼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실제로 우리는 그동안 몇 편을 발견해낸 것도 사실이다. <펄프 픽션>을 비롯한 일군의 저예산 독립영화들의 약진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큰 비평적, 흥행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 영화들을 정말로 대안적인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깝게도 작가주의라는 틀은 지금 우리가 '새롭다'라고 명명하는 영화들에도 유령처럼 살아 숨쉬고 있다. 사람들은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지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환호성을 답습하기에 바쁘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작가주의를 거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 작가주의에 대항할 만한 어떤 주장을 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나 연륜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작가주의에 의해 모든 감독들이 자기 나름대로 먼저 자기 자신을 영화에 반영하고, 그리고 두번째로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적, 정치적 성격을 반영하고, 나아가 자신의 영화 이전의 영화들을 반영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영화적 틀이 좀더 개연성 있게 담겨질 만한 보다 발전적이고 확장되어진 기준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기적 영화와 의사소통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영화들을 나는 응원할 것이며, 여기 5편의 영화들도 그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기에 선택되었다.
생각해보면, 유기적이라는 말은 매우 포괄적이다. 그래서 직접적이지 않고 엉성한 이미지들의 조각으로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 단어의 범위를 줄여 좀더 명확한 설정을 할 필요가 있겠다. 유기적이라는 단어가 선택되어진 배경에는 그것이 '기관', '겹침'이라는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유기적인 것은 어떠한 객체에 대해 주체가 기꺼이 공헌할 각오가 되어 있을 때 성립한다. 그것은 마치 피아노에 있어서 건반과 피아노줄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며, 건반이 피아노줄을 때려낼 때의 '울림'이 곧 유기적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 있어서 유기적이란 의미가 갖는 맥락은 일차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측면에 있다. 이것은 감독과 주제에 따라서 촬영기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단순논리를 끌어들이며, 또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하기 위해 그러한 스타일이 반드시 도입되어야 했는지를 검토하는 것을 과제로 두는 작업 등을 포함한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의 통일이라는 일차적 과제는 각각 내용과 형식에서의 유기성이라는 영화의 안쪽과 바깥쪽의 상호소통에 관한 논의를 출발시킨다. 안쪽에 있을 때, 이것은 이미지들이 겹쳐지는 과정을 분석하여 그 의사소통의 체계가 영화의 주제와 얼마 만큼 유기적인지를 계산해내는 것이며, 바깥쪽에 있을 때, 이것은 일종의 영화를 '팀웍'으로 간주하고 연출자와 촬영감독, 편집자 등 영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스탭들과의 의사소통 과정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스크린에 드러나는 이미지들의 충돌을 통해 알 수도 있고, 또한 직접적인 인터뷰와 제작과정을 통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 유기적이고, 또한 그 유기성이 독창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는 영화(들)을 나는 지지하려고 한다.
이것은 감독 위주로 영화를 지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며, 그에 따라 나의 평가기준은 감독 보다는 영화가 될 것이다. 작가라 불리우는 감독들의 영화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경우 유기적 의사소통의 영화 기준에 따르면, <안드레이 루블료프>, <노스탤지아>, <희생>은 잘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거울>, <솔라리스> 등은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후자의 두 편이 스타일과 내용의 조화를 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유기적 영화를 통해서도 감독들을 위주로 통칭하는 것이 가능할 때도 있다. 그것은 헐리우드 영화 같은 조직적인 영화를 논할 때나 아니면 극도의 스타일리스트들의 영화를 논할 때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계속해서 비슷한 유기성 만을 보여주는 리처드 도너, 조엘 슈마허 혹은 임권택, 박광수, 그리고 7,80년대의 데이빗 린치나 90년대의 장선우 영화 등을 논의할 때 그렇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기존의 장인영화라 불리우던 것들을 무시하고 작가영화마저도 다른 기준으로 걸러낸다는 혐의를 짙게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과 걸러내기의 과정은 아마도 수많은 영화의 범람 속에서 진정으로 새롭고 좋은 영화를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여기 선택한 5편의 영화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유기적 의사소통의 영화로 선택된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다소 자의적이고 또 건방지게 보이는 이 정의들이 앞으로 새로운 경향의 영화들에 더 잘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 만들기에 있어서 스탭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기술의 발달은 이미지들과 사운드들의 교통을 능숙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아이디어들로 가득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기적 의사소통의 영화를 평가하기 위해 처음의 수순이 당연하게도 한국영화로부터 비롯되어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한국영화들에서 이러한 영화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된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2편과 유럽영화 2편, 그리고 홍콩에서 온 영화 1편과 그 영화들이 선택된 이유들을 각각 설명하는 것으로 이 장황한 서문을 마치려고 한다. 참고로 이 비평문들은 각각 쓰여진 시기와 목적이 다소 다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밝힌 유기적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둔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이 영화들은 유기적인 의사소통의 모범을 보여준다.
먼저, <킹덤>은 그 13부작 TV 시리즈가 기획되기 위하여 많은 시도가 감행되었던 영화이다. 감독인 라스 본 트리에는 '킹덤'이라는 폐쇄적인 병원을 보여주기 위해 저감도 필름을 이용한 핸드 헬드 기법을 고안하였으며, 유린당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붉은 색 바랜 톤으로 영화를 찍었다. 이러한 카메라는 또한 에릭 크레스의 솜씨이며, 요하킴 홀벡의 음악은 <킹덤>을 하나의 스타일과 유행으로 이끌었다. 게다가 영화에 직접 등장하여 관객과 대화하는 라스 본 트리에의 기발한 모습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충분히 '킹덤'과 의사소통하였는지를 검증하는 것과도 같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철저하게 호러 컨벤션을 따르면서도 내부와 외부의 유기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타일을 고안하였고, 그 스타일을 사이에 두고 감독의 영감과 촬영, 편집의 능수능란함이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있는 영화이다.
<증오>는 두말 할 필요 없이 90년대 새로운 영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 청년들의 즉흥성인 폭발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스타일이 필요할까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터치는 픽션과의 경계를 허물면서 새로운 역동성을 창출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티유 카소비츠는 인터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그 폭동과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무엇보다 이 영화의 스탭, 배우들과 실제인물들 간의 연대의식 만큼 영화를 유기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는 아마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거의 유일하게 철학적인 뱀파이어 영화일 <탐닉>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과연 흑백 필름의 사용이 효과적이었는가일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렇다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고밀도로 잘 짜여진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관객에게 기하급수적으로 스며드는 감정의 동화작용을 통해 전달된다. 감독 아벨 페라라, 시나리오 작가 니콜라스 성 존, 촬영감독 켄 켈쉬, 음악의 조 델리아는 이 영화 외에도 이미 많은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경험이 있다. 보통 이런 경우 그 유기성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려를 왕가위 영화들에서 볼 수 있다. 미술과 편집의 장숙평, 촬영의 크리스토퍼 도일 등 지금까지 왕가위는 대부분 같은 스탭들과 작업해 왔지만, 그의 영화 중에는 단 두 편의 유기적인 영화만이 있을 뿐이다. <아비정전>과 <춘광사설>이 그것이다. <열혈남아>는 감독의 지나친 자기욕심으로 인해 실패한 경우이고,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는 스탭들이 각각 자기의 영역을 확보하고 고집하려는 데에서 생긴 불협화음을 전해줄 뿐이다. <동사서독>은 안타깝게도 절반의 성공 만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왕가위에 대한 우려를 깨고 <춘광사설>은 스타일의 절제를 통해 유기적으로 상호소통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탈출하기 힘든 미로인 <로스트 하이웨이>가 선정되었는데 이 영화는 지금 이 시대를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처럼 예측불가능한 형식을 취해 구조를 풀어버리고 있으며, 불온함을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시키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성공적인 점은 정리불가능한 그러한 내용이 영화의 형식을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현기증 나는 카메라와 특히, 음악의 정열적인 사용은 인물들의 행태와 거의 직접적인 형식으로 의사소통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묻힌 거대한 사이코 병원, 우리는 그곳을 킹덤이라 부른다
<킹덤/Riget/The Kingdom>
1994, 269분, 덴마크, Lars von Trier & Morten Arnfred / Cast: Kirsten Rolffe, Ernst Hugo Jaeregaard, Soeren Pilmark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은 13부작으로 기획된 이 TV 시리즈 중 우리는 아직 단 4편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우상처럼 자리잡은 덴마크의 병원 '킹덤'에서 우리는 이제 막 영혼과 분리된 '악'이 이곳으로 흡입되는 그 순간에 일단 다음 편을 기대하며 자리를 떠야 한다. 하지만 4시간 29분 동안, 라스 본 트리에는 시종일관 정신없는 카메라와 붉은 색조의 바랜 톤으로, 그곳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 순간을 차분히 지켜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야기는 덴마크 국립병원 '킹덤(Riget)'에서 벌어진다. 이 자리는 원래 끊임없이 안개에 의해 둘러싸이던 습지로 축축한 옷을 표백시키기 위해 햇볕에 널어 말리던 연못이 있던 곳이었다. 지금 그 연못이 있던 자리에는 병원이 세워졌으며,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미신은 절대 다시 군림할 수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 과학과 기술을 절대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만함과 영혼에 대한 일관된 거부는 너무 그 힘이 강했다. 이제 그 차가움과 축축함이 되돌아오고, 딱딱함과 화려한 건물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그렇게 킹덤으로 향하는 문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라스 본 트리에의 새로운 스릴러가 시작되는 방식이다. 원래 4개 파트로 기획된 TV 시리즈였던 <킹덤>은 동시에 필름으로 전환되어 극장에서도 공개되었다. [천상에 이르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왕국이 도래하도다], [타인의 육체], [살아있는 죽은 자]라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몇몇의 중심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병원이라는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심층적으로 전개되는 플롯을 따라가면서 우리를 심리적 공포로 이끌어간다. 코펜하겐에 세워진 이 거대한 무덤에 초대된 인물들은, 스웨덴 출신으로 덴마크를 경멸하는 헬머 박사, 간 연구에 편집증적 집착을 보이는 본도 박사, 연상의 간호사 카밀라에게 구애하기 위해 시체의 머리를 선물하는 괴팍한 인턴 모게, 1919년의 병원 원장 아게 크루거의 머리를 잉태하는 여의사 유디트, 그리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천진난만한 몽골인 소년소녀와 심기증에 걸린 강신술사로 스스로 영혼을 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만성 환자인 드뤼스 부인 등이다. 특히 드뤼스 부인은 미로로 가득찬 병원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아차리는데 신경외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소녀 유령의 울음소리를 듣고 영혼의 세계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후 그녀가 하는 일 자체가 영화의 주요 플롯이 된다. 그녀는 병원으로부터 퇴원당해도 스스로 다른 질병을 만들어 입원하면서까지 그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그녀의 맞은 편에 있는 고지식한 내과의사인 헬머는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병원 밖으로의 출입이 자유로운 인물인데 모나라는 소녀의 뇌수술 중의 실수로 인해 고소당했다가 지하조직에 가입함으로써 그 사건을 무마시키려 한다. 그는 이따금씩 '덴마크 쓰레기들'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덴마크에 대해 적개심을 표시하는데 심지어는 아이티 섬에 가서 부두교를 통해 덴마크에 대한 저주를 퍼붓기도 하는 열성을 보인다. 이야기는 이들을 중심으로 병원의 비리와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과 불신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며, 사건이 흐를수록 병원을 둘러싼 진실이 파헤쳐지면서 도덕의 파괴와 믿음의 부재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영혼들로 인해 공포의 강도가 더해진다.
이렇게 <킹덤>은 철저히 몰두하게 만드는 어두우면서도 신랄한 영화이다. 헬머와 풋내기 의사 요르겐 후크 사이에 드뤼스 부인의 CT 촬영에 대한 권한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첫 번째 충돌 이후로 계속해서 영화는 병원 내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며 그들의 행태를 비꼬는 것과 드뤼스 부인이 유령을 찾는 과정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보여준다. 많은 서브플롯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며 인물들을 부각시켜주고 영화는 그들을 각각의 임무들로 밀어넣는다. 특히 트리에는 풍자를 위해 영화 속에 병원 윤리적인 문제를 많이 삽입하고 있다. 시체를 보고 놀리는 것과 장기이식 문제, 10년에 한 번 발생할 만한 환자를 위한 연구 등 그에 따라 병원이라는 공간은 매우 놀랍고, 싸늘하게 비친다.
한편 이 영화는 일종의 유럽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영화가 꾸준히 주지시키는 숫자에 대한 강박관념은 1919년의 1차대전과 1968년의 실패한 혁명, 1972년의 패배주의를 상기시키며 헬머가 가입한 지하 조직은 일종의 파시즘에 대한 우화이다. 거대한 유럽의 역사를 담보로 한 '킹덤'은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지배했던 이성과 계몽주의의 틈새와 뒤편에서 동시에 연합작전을 편 악령과 영혼, 그리고 광기의 세계에 의해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것은 비정상적인 것을 포장지 하나로 에워싼 선물상자였던 푸코적 광기와는 다른 개념이며 오히려 많은 헐리우드 B급 영화들과 TV 시리즈들에 더 빚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트윈픽스>에서 영감을 얻었을 만한 지하 주차장의 부러진 파이프들을 비롯해 엘리베이터 속의 현기증 나는 천정과 균열된 벽, <에일리언>의 영향력 하에 놓인 수술장면, 과 , <시카고 호프>, 의 아우라, 그리고 앤 라이스의 소설 [Lasher]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 등 영화는 전체적으로 작은 일화들의 반복과 중첩으로 짜여져 있다.
어둡고 습기찬 영상은 시종일관 움직이는 카메라와 바랜 톤으로 촬영되어 마치 뉴스릴 필름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원래 16mm 필름으로 촬영된 후 비디오로 전환되었다가 나중에 극장상영을 위해 16mm로 복원한 뒤 다시 35mm로 확대한 것이라고 한다. 때때로 초현실적이고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분리된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카메라 스타일은 96년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통해서는 한편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구현했었다.
시리즈의 유연성을 위해 두 명의 천진난만한 몽골인들이 영화에 불어닥칠 고난과 심판을 예견해준다. 그들의 유약한 듯한 날카로움과 선정적이면서도 시적인 잡담은 의도하지 않던 즐거움과 오싹함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4조각의 <킹덤>을 통해 인간들이 어떻게 무험할 정도로 스스로 믿는 것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하나의 거대 조직을 움직이는 동력이 어떻게 하여 편집증적 광기에 시달리는지를 보게 된다. 앰블런스는 밤마다 도착해 환자를 실어나르며 헬머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병원에 감금된 것처럼 구속되어 있다. 과학적 연구와 원리체계, 과학과 미신, 그리고 정상적인 것과 광적인 것을 혼합하는 이러한 방식은 이제 라스 본 트리에의 영화적 특징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환영 속의 앰블런스, 꿈 속을 침범하는 살을 뜯어먹는 좀비들, 빨간 눈을 이글거리는 애완견, 그밖에도 변덕스런 대화들과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는 <킹덤>을 보노라면 마치 헬머가 하늘을 향해 '덴마크 쓰레기들아'하고 외치는 동안 라스 본 트리에는 스크린에 등장하여 '너희 킹덤 쓰레기들아'하고 우쭐대는 듯하다.
그로테스크한 '킹덤' 내부의 썩어가는 벽과 천장은 어두운 비밀에 둘러싸여있다. 이윽고 침묵의 시대 이후 벽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유럽의 쓰레기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으로 통하는 작은 구멍을 통해 영혼의 세계가 구현된다. 이제 불안한 유령들은 그들의 다음 세계에서 우리들을 환영할 것이다. 보건부 장관이 병원을 방문하면서 <킹덤>의 이야기는 점차적으로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데, 영화는 병원의 내부적 우스꽝스러움과 함께 다음 시리즈의 주인공이 될 무수한 영혼들이 병원 내부 공간으로 잠입했음을 암시함으로써 호러 파티를 예고하며 끝난다. 아마도 17세기의 덴마크 왕자 햄릿 이후 또하나의 썩어가는 덴마크를 볼 수 있는 기회이며, 코펜하겐의 실존하는 병원의 환자들을 집단 퇴원하게 만들 만한 잠재적 힘을 지닌 이 영화는 거의 덴마크의 컬트 시리즈가 될 것 같다. 실제로 94년 12월에 TV 방영이 있을 당시에는 거리가 한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놀라운 프로젝트의 13이라는 음험한 숫자에 도전하고 있는 말썽꾸러기 주인공인 라스 본 트리에는 <범죄의 종말>, <유로파>,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통해 역사와 도덕 문제를 독특한 스타일로 그려낸 감독이며 따라서 앞으로 계속되는 <킹덤>의 시리즈를 기다리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다른 부분이 어떻게 이 냉소적인 유머로 가득찬 스릴러를 환영하는지, 라스 본 트리에의 상상력에 기대어 그저 다음 영화를 위한 경악을 아껴둘 따름이다.
착륙과 추락 사이에서, 세상은 우리의 것
<증오/La Haine/Hate>
1995, 95분, 프랑스, Mathieu Kassovitz / Cast: Vincent Cassel, Hubert Kounde, Said Taghmaoui
"사회는 마천루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아. 한 층씩 내려올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지.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 추락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착륙하는 것이 중요해."
 우리는 자동차를 불지르고 건물의 유리창을 깨는 교외의 청년들과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는 경찰들의 모습을 본다. 흑백 영상의 강렬함은 그것이 보도자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긴박감을 예고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 명의 청년들과 하루를 함께 보내게 된다. 긴장과 무기력 속에서 시계 초침 만이 총탄처럼 날아가고 세 친구들은 경찰서에서 죽은 한 청년의 그림자와 곧 다가올 사회적 추락의 환영 속에서 싸운다.
1993년 서로 다른 인종의 남녀 3명 간의 삼각관계를 다룬 <혼혈아>로 데뷔했던 마티유 카소비츠는 95년 두번째 영화인 <증오>로 깐느 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헝가리 이민계인 아버지 역시 영화감독이고 어머니는 영화 편집을 하기에 자연스럽게 영화와 친해질 수 있었다는 그는 12세부터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배우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1994년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라>를 통해 세자르 신인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비열한 거리>를 보고 영화를 선택했다는 그는 비록 97년 <암살자(들)>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프랑스가 기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유럽국가들, 특히 프랑스는 프랑스적인 것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사회이다. 그들의 '걸러내기'는 거의 진보 이후의 예식처럼 행해졌으며, 그에 따라 장-마리 르 뼁과 같은 정치적 리더는 그의 반-셈족적이고 반-이민적인 통렬한 비난으로써 놀랄만한 총 득표를 모으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마도 몇몇 프랑스 관객들은 <증오>의 그늘에 가려진 프랑스 신-나찌 극우주의의 잠재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눈치채기 힘든 서브텍스트를 읽어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증오>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제, 교외 빈민가 출신인 젊은이가 그의 친구가 실제로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그의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갈 만한 것을 상상하라." 카소비츠는 파리시 18구 경찰서에서 죽은 이민계 청년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증오>를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는 한 청년의 갑작스런 죽음과 프랑스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는 실업 문제, 인종편견감정, 그리고 도시와 교외의 문제와 경찰들의 권력남용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에 사회당이 집권한 후 파리 교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할 정도로 무관심했으며 그에 따라 심각해진 파리와 그 교외 청년들(주로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계나 아랍계, 유태계 등 외국인이 많이 사는 추세다)의 빈부격차는 폭력사태로까지 치닫는 원인이 되었다. <증오>의 세 젊은이들 역시 바로 이 인구층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성난 빈쯔는 노동자 계급의 유태인이며, 침착한 위베르는 아프리카계 권투선수, 불손한 사이드는 아랍인이다. 그들이 차례로 일탈하는 과정은 우정이 인종계급에 기초하기 쉽다는 프랑스 내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폭동 속에서 한 아랍인이 경찰에 의해 구타당한 뒤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이에 대한 적개심과 반작용은 세 친구들을 분노 속으로 몰고간다. 도시의 외곽에서 주변인인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이 중요한 지를 아는 것이며, 그들은 거리를 배회하면서 동료들을 끌어모으려 한다. 특별한 직업이 없는 그들은 위베르의 체육관에 모여 폭동의 불꽃을 이어간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펀치백을 두드리며 차고 문을 발로 찬다. 그들의 편집증적 증세는 로버트 드 니로를 흉내내는 빈쯔에게서 절정에 달하며, 이윽고 '스누피'에게 돈을 얻으러 가기 전에 경찰의 총을 도난당했다는 TV의 뉴스는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그들은 목적없이 그들의 교외를 이동하여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사건들 뒤로 놓여 있는 것은 정작 그들이 할 만한 것이라고는 마리화나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은 직업도, 전망도, 경제적 독립의 진지한 희망도, 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그들을 놀래켜줄 방법이라고는 일탈 밖에는 없는 것이다. 결국 다음날 새벽, 젊은 아랍인이 상처로 인해 죽었다는 뉴스 보도가 나온 직후, 빈쯔의 겉잡을 수 없는 행동과 함께 사태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카소비츠는 이 영화를 선택이 정해진 경직된 프랑스 사회에서 '젊은이가 경찰을 모욕하고 다시 경찰이 그 젊은이를 모욕하는 끔찍한 증오의 순환'을 폭로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파리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시떼'라는 교외에서 촬영되었으며 이곳 인구의 80%, 청년들의 100%가 실업자들이라고 한다. 이를 표출하기 위해 카소비츠는 매우 즉흥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도발적으로 찍어낸 흑백촬영은 매우 자극적이고, 절망적인 풍토병 같은 주제를 젊은 리듬으로 호흡할 수 있게 도와준 시네마 베리떼적 양식은 관객들에게 일종의 압박감을 부여하며, 이러한 스타일을 바탕으로 그는 그의 인물들이 미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의미들로 프레임을 채우고 있다. 많은 프랑스 영화들이 피사체를 실제보다 더 화려하게 보이게 만들려는 유혹에 빠져 파리나 니스의 그림같은 경치 속에 인물들을 놓는 반면, 카소비츠가 그의 영화에 등장시킨 그 구체적인 교외의 모습은 마치 에릭 로메의 87년작 <남자친구들과 여자친구들>에 나타난 황폐한 환경과도 같이 오히려 아무 것도 돌려주지 않는 프랑스를 보여주는 것에 더 집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텅빈 공간의 경치는 세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그들의 적대감을 드러내도록 돕는다. 그럼으로써 <아이들>, <보이즈 앤 후드>, 그리고 <택시 드라이버>를 비롯한 스콜세지의 영화들의 테마를 구현하고 있는 이 영화는 그러나 그것이 다분히 프랑스적이라기 보다는 세계의 어느 도시에서라도 적용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이다.
<증오>의 결말은 다소 예측할 수 있고 불가피한 것이지만, 동시에 효과적이다. 이 영화는 착륙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단지 추락에 관한 것일 뿐이다. 95분 동안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체제에 저항하며 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폭력이 서로의 심장을 겨냥할 때,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던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멀리 달려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우울한 추락의 감정일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영원의 굴레에 틀어박힌 뱀파이어들의 지독한 삶
<탐닉/The Addiction>
1995, 82분, 미국, Abel Ferrara / Cast: Lily Taylor, Christopher Walken, Anabella Sciorra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당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내가 보여주지."
 | |
<탐닉>은 사악하고 폭력적인 모든 것에 대한 인간적인 매혹을 경고하는 영화이다.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뱀파이어라는 인간의 반대편에 선 캐릭터를 통해 풀어가면서 감독인 아벨 페라라는 '탐닉'과 '영원'에 관한 절망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섹시하고, 정치적이고, 풍자적이면서 또한 동정이 가는 인물인 릴리 테일러(캐슬린)는 뉴욕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그녀는 'My Lai' 학살에 관한 끔찍한 사진들과 나찌 캠프, 그리고 보스니아로부터 온 뉴스 자료들을 보고 그 끔찍함에 대해 한숨을 쉬는데, 이러한 인간 세계의 잔혹성은 앞으로 펼쳐질 인간 뒤편의 또다른 숨겨진 잔혹한 세계를 암시하기 위해 고안된 역사적 장치이다. 그녀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뱀파이어인 아나벨라 스키오라에 의해 물리면서 '거리의 방랑자'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여기서 그들의 피와 거리를 떠도는 이미지는 각각 AIDS와 미국의 이민정책 등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으며, 영화가 진행될수록 페라라는 그의 특기를 살려 이것을 종교적인 것과 결부시키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처음에는 피하주사기를 필요로 했지만 의치가 생긴 이후 스스로 타인의 목을 물 수 있게 된 테일러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도취감에 빠진다. 그녀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심지어 교수까지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이며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프로이어바흐, 사르트르, 하이데거를 등장시키는 끊임없는 철학적 논쟁 속에서 인간과 뱀파이어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가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여 의식을 치룰 때마다 그녀의 신경은 갈수록 날카로워져가며 이것은 관객들에게조차 이제 그녀에게 어떤 정신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때마침 거리를 배회하던 그녀는 "나는 이제 거의 인간이 되었지"라고 말하는 크리스토퍼 월큰을 만난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어떻게 자기의지를 사용하여 스스로 통제가능한 뱀파이어가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는 윌리엄 벌로우즈의 [네이키드 런치]를 그녀에게 권하면서 지독하리만치 오래 지속되는 뱀파이어들의 세계를 그녀가 절실히 깨닫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의 논조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신의 사후 영원한 삶을 누리는 유일한 존재가 된 그는 인간적인 삶의 권태와 무한한 비통함을 벗어나기 위해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적인 죽음을 갈망하고 있었다. 마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지독한 회의주의자 말론 브란도를 연상시키는 크리스토퍼 월큰을 만나 그의 설교와 함께 목덜미를 물린 이후 테일러의 행보는 이제 물고 물리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반복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여러 인간들을 유혹하여 물어뜯음과 동시에 밤거리에서 울부짖으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녀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임과 동시에 무한한 실존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것이다. 이제 영화는 그녀가 대학의 철학전공자들이 모인 파티를 뱀파이어 호러 파티로 만들게 함으로써 유혈낭자한 숭고함으로 뒤범벅된다. 소름끼치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는 이 장면은 마침내 그녀가 그녀의 삶을 뛰어넘는 법을 배우고 신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을 목사 앞에 고해성사하게 함으로써 끝난다. 하지만, 자신의 무덤 앞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뱀파이어로서의 정체성을 찾은 듯한 그녀는 그녀가 찾은 신이 어디에 있는 지를 확실히 알 지 못한 채 묘지를 거닌다.
아벨 페라라는 이 영화의 장르를 '도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 자신에게 내재한 '악'을 끄집어내는 것이 이 영화의 모티프인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테일러는 곧 그녀의 재물이 될 인간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 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당신을 보내주겠어." 이것은 죄가 그곳에 있다면 항상 그에 대한 보상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페라라의 영화의 법칙을 이어가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자 페라라의 명콤비인 시나리오 작가 니콜라스 성 존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성이 페라라적 무정부주의 속에 음침하게 뒤섞인 것이기도 하다. 시종일관 철학적인 대화들이 흑백의 영상을 둘러싸고 있고, 놀라기에는 너무나 음침한 아우라가 자학적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영화는 결국 (아주 서구적인 방식으로) 종교적인 것, 그리고 '신의 빛'이라는 의식 속에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가?"에 관한 처절한 독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절망해야 했던 거리의 방랑자들의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영화 탄생 이후 가장 철학적이고 논쟁적인 뱀파이어 영화일 <탐닉>은 느리게 진행되면서도 차츰차츰 상승되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마치 조각상 같이 정교하게 짜여진 플롯을 가지고 있다. 빛과 어둠의 조화는 강렬하며 이것은 <나쁜 경관> 등으로 페라라와 작업한 적 있던 켄 켈쉬의 솜씨이다. 지미 레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아벨 페라라는 1952년 뉴욕의 브롱스에서 태어나 10대에 수퍼 8미리로 아마추어 영화를 찍음으로써 영화에 데뷔하였다. <드릴러 킬러>, 로 컬트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크리스토퍼 월큰이나 하비 케이틀 같은 배우들과 늘 함께 영화를 찍으면서도 좀처럼 뉴욕을 벗어나지 않고 값싼 영화 스타일을 유지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호화캐스팅의 <블랙/아웃>으로 깐느를 방문한 이후 <지하철 이야기>라는 TV 시리즈를 찍고 있다고 한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렇게 가까이
<춘광사설/春光乍洩/Happy Together>
1997, 92분, 홍콩, 왕가위 / Cast: 양조위, 장국영
홍콩에서 아르헨티나는 지구의 정반대편에 있는 아득히 먼 곳이다. 홍콩의 겨울과 아르헨티나의 겨울은 추운 겨울과 따뜻한 겨울이고, 그것은 또한 흑백, 컬러 화면의 대비이며, 이것은 상반되는 감정을 나타낸다. 실제로 왕가위는 컬러와 흑백의 사용은 각각 현재와 과거의 시점에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그들의 내면적인 공간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바로 그곳에서 이제 막 한 커플이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마누엘 푸이그의 소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 프로젝트가 결국에는 '블로우 업' 되어 <춘광사설>이 되었다. 왕가위가 스스로 '서정과 사랑의 영상이며 은유'라고 말하듯이 이 영화는 봄을 기다리는 어느 추운 겨울날,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이다.
라이(양조위)와 호(장국영)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실제로는 빈민구인 '라 보카'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구아수 폭포, 남미 남단에 위치한 우슈아야의 등대, 대만, 그리고 홍콩에서 서로를 생각한다. 비행기와 활주로 같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 연약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지만, 오히려 서로를 스쳐가는 외면 속에 그들은 문득 정지하는 시간을 느낀다.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 그 두 번의 마주침은 덧없이 지나가지만 고정된 기억을 각인시킨다. 라이와 호의 관계는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에 맞추어 흔들리고, 그들이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깨닫을 때 라이에게는 장(장진)이 찾아오지만 호에게는 아무도 없다. 이전까지의 전개와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하는 장의 등장은 영화의 실타래를 홍콩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잇는 구부정한 선분에서 그 사이로 대만을 관통하는 삼각형으로 기워간다. 라이와 장은 작별인사 없이 포옹하고 라이는 대만의 야시장에서, 장은 우슈아야의 등대에서 서로를 생각한다. 영화를 녹색과 붉은 색으로 수놓던 탱고 음악과 함께 폭포 역시 세 인물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인물들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폭포를 바라봄으로써 가까이 있을 수 있다. 폭포는 항상 거기에 있고 그렇게 흐르는 것이다. 라이와 호, 혹은 장의 눈물처럼. 곧 라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고 이때 물길을 따라 "3을 위한 밀롱가"가 흐른다. 라이는 거꾸로 비추어지는 고향에, 호는 지구의 반대편에, 장은 라이의 거주지에 있지만, 그들의 공간에 대한 낯설지 않음은 영화 뒤편에서 함께 행복함을 예고한다. 터틀즈의 곡을 리메이크한 대니 청의 "해피 투게더"는 그런 의미에서 미래를 위한 (기약없는) 축제이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것은 매우 슬프지만 삶을 패배의식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유일하게 용기 있는 제안이다. <춘광사설>은 일종의 연애편지 같은 영화이다. 마치 안부인사를 교환하고 여운을 남기며 끊는 한 통의 전화통화와도 같다. 1995년 5월 1일, 홍콩을 떠나는 라이와 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사랑, 직업, 일상 등에는 모노크롬의 필터를 통과하는 권태가 배어들어 있다. 그들은 계속되는 시계탑의 시간-이미지처럼 불안하게 낯선 공간을 배회하다가 97년을 지나 그곳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시간을 알 수 없는 장소인 폭포는 그들의 중심에서 서로의 의사소통을 돕는다. 홍콩에서 라이는 등소평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곧 97년 7월 1일 - 정확하게는 23시 59분에서 00시 00분으로 넘어가는 순간 - 에 직면할 것이다. 그들이 그 이후에도 해피 투게더 할 수 있을까? 야시장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과 기차가 도착한 종착역의 백색 불빛 만이 대답을 대신한 채 이미지로 다가온다.
<북경지하>와 <춘광사설>을 동시에 진행하다가 <춘광사설>의 제작지연으로 <북경지하>를 97년 7월 이후로 미루게 된 왕가위가 <춘광사설>에서 고민한 것은 홍콩의 밖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금, 그 질문은 홍콩이 시간과 공간의 외부로 물러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가위는 그 대답을 지구라는 원형의 동일성과 그에 따른 안도감에서 찾았다. <춘광사설>은 긴 궤적을 그리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설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공간에 지배되지 않는 시간을 다룬 영화라는 것을 주지시킨다. 그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그 반대편의 홍콩에 있으면서도 결코 이국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사랑과 실연은 우리 모든 인간에 관한 것이다.
왕가위는 <춘광사설>을 '직접적'인 영화라고 말한다. 직접적으로 인물의 관계를 보여주고, 직접적으로 간극을 재현하며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시하는 것이다. 왕가위의 이전 영화에서 인물들은 허구적이고 타자에게 자신을 이입시키는 듯한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이 무척 현실적으로 표현된다. 우선, 이 영화를 둘러싼 퀴어 영화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이것은 동성애를 그린 영화라기 보다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사랑은 느낌과 감정에 관한 것이지 결코 객체나 대상의 성질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섹스 역시 눈보라 속에서 추위에 벌벌 떠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보인다. 또한, 이 영화가 현실적인 이유는 양조위와 장국영의 동정적이며 무표정한 연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짧은 초점거리 렌즈에 의해 촬영된 영상들이 루프를 반복하는 단조로움에 수시로 겹쳐지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이전의 영화들에서 시간의 연속을 능숙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스텝 프린팅' 기법을 자제하고 이 영화에서는 시간의 단절을 드러내기 위해 '인 카메라 에디팅' 기법을 사용했다.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에 의하면 특정 장면에서 카메라를 껐다가 다시 켜는 이 기법은 관객이 영화로부터 분리되게 만드는 장치라고 한다.
영화의 직접성과 더불어 '좀더 강렬한, 좀더 꽉 찬, 하지만 위험한, 신경 쇠약 직전의 이미지'를 얻으려는 노력은 인물들에게 특정한 상징적인 운동에 집착하게 한 설정에서 두드러진다. 그 운동은 탱고, 폭포, 그리고 축구에서 나타난다.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탱고나 폭포와 달리 특히 축구는 아르헨티나와 홍콩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행복하게, 골을 외치는 아나운서의 음성을 비롯하여 골목길에서의 축구시합은 처음에는 역광으로 촬영되어 일종의 몽상처럼 보이다가 나중에는 라이의 심리를 드러내주는 도구로써 존재한다. 그리고 감정의 이동이라는 그와 같은 역동성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태도와 그 발전적인 상승의 구조를 깊이 체험하도록 이끈다.
<춘광사설> 이후, 왕가위에게는 스타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임의적으로 작업하는 그의 영화촬영현장에 기인하는 것 뿐이다. 그는 항상 이야기를 찾아가며, 그에 따라 이미지들이 시나리오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곳에 영화를 위한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언제나 제작의 도중에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함께 행복하리라고 믿게 만들어준 신념의 영화인 <춘광사설>을 접한 지금, 97년 7월 이후로 밀려난 <북경지하>는 아마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영화일 것이다. 심지어 지금 영화를 촬영 중인 왕가위 자신도 말이다.
카프카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이미지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
1996, 142분, 미국, David Lynch / Cast: Bill Pullman, Patricia Arquette
고속 도로를 숨가쁘게 질주하는 이 영화는 영화가 탄생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영화에 관해 무언가 놀랄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주는 색다른 경험이다. <사이코>처럼 양분되며, <현기증>처럼 함정에 빠지는 <로스트 하이웨이>는 장르적으로는 <매드니스>에 비견될 만한 공포영화이며, <쉘로우 그레이브>를 연상시키는 스릴러이면서 또한 80년대에나 통할 만한 코미디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편, <쎄븐>의 건조함은 그로테스크 아우라로 바뀌었고, <크래쉬>를 연상시키는 몇몇 장면들은 크로넨버그 만큼이나 병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들하고는 또 다르다. <12 몽키스>의 연결고리처럼, 타나토스의 미로처럼, 카프카의 고뇌처럼, <로스트 하이웨이>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퍼즐이다.
데이빗 보위와 함께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트렌트 레즈너와 함께 폐쇄공포를 즐기는 린치는 퍼즐의 뒤에 숨어서 퍼즐 앞에서 고민하는 관객들을 한껏 조롱한다. 그는 우리를 웃기고 놀래키며 공포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록키 호러 픽쳐 쇼>의 20주년을 알리는 또다른 '참여' 영화이기도 하다. 수많은 노래들은 관객을 영화 속으로 빠져들게 하며, 심야의 컬트영화 제왕 답게 계산된 몇몇 씬들은 보는 이들을 열광하게 만든다. "Two Thumbs Down!!"을 외치며, 96년 최악의 영화라며 비웃던 미국 평론가들의 평가는 틀렸다. 차가운 심야 고속도로의 극장에 꼭 어울릴 이 영화는 <블루 벨벳>에 비견될 만한 린치의 걸작이다. 로렌트는 죽었지만, 데이빗 린치는 아직 죽지 않았다.
1. 딕 로렌트는 죽었다
"딕 로렌트는 죽었다." 이 문장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엄숙하면서도 화려하게 장식한다. 첫 부분에서 이 문장은 영화의 분위기와 전개를 단숨에 암시하고, 끝 부분에서 이 문장은 영화를 처음으로 돌리면서 안전하게 끝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영화를 풀어내는 모든 열쇠는 이 문장 안에 숨어 있다.
프레드(빌 풀맨)는 테너 색스폰 연주자이고, 그의 부인 르네(패트리샤 아퀘트)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은 단조롭게 보이지만, 시종일관 음침한 분위기는 둘 사이의 괴리를 암시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성불구라는 프레드의 자괴감(이에 따라 이후 프레드의 변신을 요나 컴플렉스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날 르네는 프레드가 연주하는 클럽에 가기를 거부하면서 차츰 불신의 벽이 구체화된다. 연주를 마친 프레드는 집으로 전화를 걸지만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다. 더우기 매일 의문의 비디오 테잎이 배달되고 그 테잎에는 그들 부부의 모습이 (불가사의하게 촬영되어) 담겨져 있다. 애정 없는 섹스 후에 르네에게서 괴물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프레드, 그리고 긴 머리를 동양적으로 늘어뜨린 르네, 그들은 서서히 그들 내부의 또다른 관계 속으로 함입하기 시작한다. 어느날 르네가 갑자기 사라지고 또다시 배달된 비디오 테잎 속의 살인사건, 그 현실 혹은 환상 속에서 프레드는 르네를 죽였다는 것을 스스로 보았고, 이에 죄를 뒤집어쓰고 그는 사형을 앞둔 죄인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화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관객을 일방적으로 타자화시키지 않고 텅빈 공간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배려이다. 관객은 이제 제 3자에서 프레드로, 그리고 프레드의 분신인 피트로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재빨리, 설명하지 않는 영화의 음산함은 프레드를 곧장 감옥에 가둔다. 이 장면에서 기승전결 양식을 거부하고 여타의 영화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 있는 재판과정 - 실제로 이런 종류의 영화들에서는 재판 만으로 영화를 진행시키고 사건을 연결해나가는 방식과 수법들이 비일비재하다 - 을 과감하게 생략해버린 단 하나의 점프 컷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영화의 전반부를 재빨리 종결지음과 동시에 이제 색다른 분위기의 두번째 부분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커다란 활력소로 작용한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동양적인 신비함과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바람, 그리고 광기에 의해 확보된다.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 막 뛰쳐나온 듯한 미스테리 맨(로버트 블레이크)은 심령술을 발휘하며 프레드와 피트에게 접근하고, 다음 장면에서는 아무 단서도 없이 그저 프레드는 사라지고 대신 피트가 프레드의 자리에 있게 된다. 이러한 순간적 변화는 영화사 초기의 조르주 멜리에의 마술을 90년대식으로 재현하는 것과 같은 놀라움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차이점이라면, 멜리에에게 있어 그것은 기쁨과 환상이었지만 린치에게 있어 그것은 공포와 전율이라는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소 느슨한 내러티브 전개에 기초한다. 피트는 그의 훌륭한 고객 에디(딕 로렌트의 이중생활(?))의 여자 앨리스(르네의 도플갱어)의 유혹에 이끌리고 그에 따라 그는 그의 여자친구였던 쉴라를 버리고 그녀를 탐닉한다. 마치 갱스터 영화 혹은 팜므 파탈 영화처럼 에디를 피해 도망가기 위 해 앤디를 죽인 피트는 이윽고 앨리스에게 배신당한다. 이윽고 영화는, 데이빗 린치 자신이 이미 <광란의 사랑>에서 보여준 적 있던 장면이지만, 그 틀을 벗어나 <블루 벨벳>의 일상성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와 <트윈 픽스>의 빨간 커튼을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복귀한다. 피트와 앨리스는 한밤중에 자동차의 라이트 아래에서 섹스하고 - 에로스 내부의 타나토스의 본능 - 환한 빛 속에서 피트는 다시 프레드가 된다. "붉은 방 너머에 진실이 있다"고 믿었던 트윈 픽스 마을의 쿠퍼 수사관처럼, 프레드는 그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 그 선은 아마도 동양적인 의미의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선일 것이다 - 연결되는 순환이라는 과정 속의 진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프레드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 만큼은 명백하다.
피트도, 앨리스도, 미스테리 맨도, 딕 로렌트도 모두 프레드의 내부에 잠입해 있던 또다른 자아라는 의심은 영화 후반부에 프레드가 자신의 집에 남기는 메시지, "딕 로렌트는 죽었다"를 통해 영화라는 고속도로의 바깥으로 불거져 나온다. 프레드는 자신의 집 외부에서 그렇게 말하고, 동시에 자신의 집 내부에서 그 말을 듣는다. 그 소중한 한 문장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정신분열증에 걸린 프레드의 자아와 초자아를, 그리고 실재와 환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울림이자 단서가 된다. 하지만, 그 어떤 실타래도 더이상 풀리지 않은 채 영화는 프레드의 미친듯한 질주 - 그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듯한 일그러진 얼굴 표정과 함께 - 를 따라가며 막을 내린다. 여전히 데이빗 보위는 '나는 미쳤다'고 읊조리고, 그 소리는 원점으로 되돌아와서 이제 두 가지 세계를 지나 제 3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영화를 정당하게 방어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는 거기에서 끝난다. 질주 뒤의 제 3의 세계는 또다시 관객의 몫인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우리는 미노스 왕의 미로를 통과하는 테세우스에게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건네받지 못했다.
2. 거울 이미지 - 위대한 정신분열증
프레드의 "나는 내 방식대로 기억해. 실제 일어난 일은 기억할 필요 없지."라는 문장은 또 하나의 열쇠를 쥐고 있다. 인물들은 자주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는 거울 속의 자기를 바라본다. 카메라 테크닉은 누가 진짜 자신일까를 의심하게 만들고 인물은 자신의 모습에 당혹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실재의 자신과 거울 속의 자신, 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조셉 콘라드는 인간의 아무리 공개적인 행동이라도 밝혀지지 않는 비밀스런 측면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은 어두운 실내에서 거울을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일까? 다시 자끄 라깡이 안내하는 거울단계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그래서 거울 속의 자기와 닮고 싶어하는 것일까?
거울 속에 비친 두 가지 상이한 인물 만큼 영화 속의 캐릭터도 각각 두 가지의 모습을 담지하고 있다. 프레드와 피트, 르네와 앨리스, 에디와 딕 로렌트, 그들은 모두 도플갱어들이며 두 가지의 삶을 산다. 그리고 서로를 보면 죽기 때문에 위대한 타나토스의 미로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 채 - 혹은 서로를 거부하면서 -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이렇게 양면성을 지닌 인물들 사이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있다. 고전 공포물의 막스 폰 시도우를 비롯 여러 예언자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그 인물은 자신 역시 두 가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 삶과 죽음의 경계, 혹은 전혀 다른 세계의 두 가지의 삶을 넘나들면서 - 그들의 인식을 제어한다. 무표정의 창백한 얼굴로 프레드가 로렌트를 죽이는 데에 공조하는 그는 프레드 혹은 피트의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면서 프레드 혹은 피트를 조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곳으로 질주하며 미쳐버리는 프레드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우유부단한 햄릿으로 불리워야 할까?
르네 혹은 앨리스는 서로를 부인한다. 앨리스는 사진 속에 나란히 서 있는 르네를 무시해 버리고, 르네는 앨리스의 행동 따위는 알지 못한다. 앤디의 집에서 포르노를 연기했던 앨리스는 피트가 앤디를 죽이자 죄를 피트에게 돌리고 돈을 챙기기 시작한다. 거실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서는 앨리스의 포르노 영화가 상영중이고, 거실을 배회하는 앨리스는 스크린의 앨리스를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목이 잘린 딕 로렌트의 손에 쥐어진 액정 화면에서 보여진 몇 장면의 포르노그라피처럼 르네와 앨리스의 관계 역시 레스비언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는 그들 사이를 암시 하는 어떤 장면도 없다. 단지, 앨리스가 프레드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르네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는 상상의 단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데이빗 보위의 "I'm Deranged"는 고속도로를 수놓는다. 뒤쫓아오는 경찰차보다 빠른 속도로 내닫으면서 머리를 흔들며 "난 미쳤어"를 노래하는 그로테크스함은 계속된다. 애매모호한 자아의 분열을 다루던 영화는 처음과 중간부분과 끝이 따로 정해진 것 같지 않다.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더라도 사건은 순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환은 고속도로가 있기에 가능했다. 불타버리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상복귀하는 오두막처럼 영화는 질주하다가 시치미 뚝 떼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순환은 될지언정 '복귀'는 아니다. 딕 로렌트를 죽인 프레드는 더이상 테너 색스폰을 불던 프레드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순환고리를 통해 프레드는 피트로 변하는 것 외의 또다른 정신분열을 경험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프레드의 집 내부와 외부를 통해, 그리고 인터폰을 통해 서로를 목소리로 교통한 '프레드(들)'은 집 내부로 돌아가 르네를 의심하거나, 한편으로는 경찰에 쫓기며 순환하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강렬한 패닝 쇼트와 고속 트래킹 쇼트로 긴박감 넘치는 고속도로 시퀀스는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극중에 등장하는 호텔의 이름처럼, '잃어버린 고속도로'인 것이다.
3. 호러 픽쳐 쇼 - 호러 사운드 쇼
이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의 눈길을 잡아끌게 하며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듦과 동시에 말도 안되는 장면에 황당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그 황당함을 만들어내는 주된 요인은 음악의 사용에 있다.
피트와 앨리스가 눈길을 마주칠 때 슬로우 모션에 루 리드의 "This Magic Moment"가 흘러나온다.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손에 쥔 땀을 놓고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 장면은 시종일관 무겁던 영화를 다이어트시킨다. 그와 더불어 삽입된 많은 음악들은 영화와 대화한다. 독일의 하드록 밴드 Rammstein의 "Hierate Mich"는 특히 영화 속의 백미이다. 굵직한 목소리와 함께 포르노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앤디의 집을 훑어내는 카메라는 글자 그대로 전율적이다. 영화음악을 처음하는 Marilyn Manson의 "I put a spell on you"는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제이 호킨스의 목소리로도 삽입되었던 곡 인데, 여기에서는 특유의 굵은 음성에 실려 폭발할 듯 터져나온다. 전체적인 음악을 담당한 린치의 음악 파트너인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악상은 항상 그렇듯이 영화의 분위기를 압도하는데,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다른 많은 곡들의 빛에 가려 약간은 위축된 듯한 감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음악들이 상당수 트렌트 레즈너의 작품들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추럴 본 킬러>, <쎄븐>에 이어 이 영화의 음반을 제작하였는데, 아마 또하나의 명반 O.S.T 속에 포함되어야 할 만큼 훌륭하다. Nine Inch Nails의 이름으로 그가 직접 만들고 부른 "The Perfect Drug"을 들어보라. 나는 이 음악이 데이빗 보위의 "I'm Deranged"와 더불어 <로스트 하이웨이>의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한다.
호러 영화에서 소리 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샤이닝>에서는 거의 음향효과를 통해 대부분의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성공적이다. 심지어는 소리가 영상을 이끌어가고 있기까지하다. 아마도 수년이 지난 후, 관객들은 재개봉한 이 영화를 보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르고 오싹한 장면들에 함께 놀라며 영화가 주는 인터렉티브한 매력에 즐거워할 것이다.
4. 뫼비우스의 띠 -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
동양식 스타일로 눈썹이 없는 미스테리 맨은 말한다. 극동의 어느나라에서는 사형수를 남몰래 가두어 두고 뒤에서 총을 쏴서 죽여버린다고. 배리 기포드의 [밤의 사람들(Night People)]이라는 소설에서 영감받아 <로스트 하이웨이>를 구상했다는 데이빗 린치는 이 영화를 열린 영화라고 말한다.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영화'인 것이다.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의 고리를 플롯으로 취하고 있으며, 장르 컨벤션은 심리 드라마에서 호러까지를 넘나든다.
린치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미국 중산층 사람들의 위험한 일탈이다. 그에 따라 그의 영화 세계에서는 주로 겉으로 평화롭게 보이는 알려지지 않은 마을에 살인사건이 벌어지는가 하면, 한 변태 싸이코가 평범한 가정을 침입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평화롭게 보이는 중산층은 깨어지고 파헤쳐지고 산산조각난다. 그에게 있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 더러운 쓰레기장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린치는 쓰레기장을 있는 그대로 담는 대신 거기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 초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그 이중의 가면을 벗기려고 한다. 그것은 천사, 가수, 오즈의 마법사, 울새, 미지의 남자 등으로 형상화되는데 주인공과의 관계로 인해 그 실제 모습보다 더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린치 영화에서 끊임없이 모티프로 등장하는 것은 붉은 커텐과 붉은 방, 그리고 기형의 인간이다. 그것들은 SF라기 보다는 심령술의 마술에 걸린 듯한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 그들은 있지만, 그들이 있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 린치의 이상한 공간은 그러나 확장되지 못한다. 신비로운 만큼 선량한 그들은 세상이라는 어둠에 둘러싸여 길을 잃고 다시 커튼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가장자리에서 린치의 절대자는 더이상 착한 존재이기를 거부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길을 잃은 자리에 '로스트 하이웨이'라는 정신분열증 환자 보호소가 세워지면서 시작된다. 이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라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이빗 린치가 <로스트 하이웨이>를 뫼비우스의 띠로 구성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활활 타오르다가 다시 타지 않는 - 연소상태에서 처음으로 돌아와 오로지 시간만 재로 남는 - 오두막(이 무대는 시간이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표상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에 살면서 낮은 읊조림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 절대자가 <로스트 하이웨이>에서는 린치의 이전 영화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화에 개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버트 블레이크가 연기한 동양적인 매력을 지닌 이 캐릭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면서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찾아온다.
그러나, 영화는 두 세계가 서로 의사소통하지 못한 채 - 단지 초현실적인 현상으로 치부된 채 혹은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되돌려진 채로 - 어두운 고속도로를 끊임없이 질주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고속도로는 영화의 시작이면서 또한 영화의 끝이 되고, "딕 로렌트는 죽었다"라는 한 문장은 인터폰을 사이에 두고 영화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말하자면 시간은 실재한 적이 없고, 모든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거나 보르헤스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이며, 딕 로렌트는 결코 죽지 않는(죽을 수 없는) 것이다. 기가막힌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서 더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는 미쳐버린 채로 고속도로를 타고 증발해 버렸고, 감독인 데이빗 린치는 누구도 모른다며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미로 속에 빠져 결코 흘러가지 아니한 시간의 퍼즐을 짜맞추는 것, 개입과 탈주를 거듭하고, 코미디와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지적인 허영이 아닌 순수한 정신분열로 복제가 아닌 카프카적 변이를 꿈꾸는 것 - 이것이 바로 <로스트 하이웨이>가 단순한 심리 스릴러를 뛰어넘어 <현기증>을 잇는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영화는 경험의 영화이며, 스스로의 방식으로 기억되는 영화이다.
|
  
 |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
|
국가별 검색
가격대별 검색
국가별 검색
가격대별 검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