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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tation of Life


<버스, 정류장> 띄엄띄엄 가는 영화 :::


양유창 | 2002년 03월 01일
조회 8410


느릿하게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한 요즘이다. 마음의 여유를 빼앗긴 듯한 일상이다. 며칠 전 보았던 <버스, 정류장> 시사회는 '바나나테라피'가 되지 못했다. 그런 건 '오아시스'에게나 가능한 것일까.

사실 <버스, 정류장>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루시드 폴의 음악이 조금 아깝다고 생각하던 정도였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소감 역시 전과 다르지 않다. 음악이 아깝다. 화면과 전혀 붙지 않는 너무 멋진 음악은 계속 내 귓가에 남아 있다.

<버스, 정류장>은 너무 말이 많은 영화다. 대사가 많은 건 아닌데도 설명이 많다. 영상으로 해야 될 것을 말로 하려고 한다. 또, 띄엄띄엄 가는 영화다. 극중 김태우의 대사 중 이런 게 있다. "인간은 인생을 한 번에 연속해서 살지 않고 띄엄띄엄 살 수 없을까?" 영화는 마치 그 대사를 시험해보는 것 같다. 호흡이 띄엄띄엄 끊긴다. 그렇다보니 등장인물이나 이야기흐름에 감정이입할 수 없다. 무슨 브레히트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쉬웠던 것은 위와 같은 불편한 요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태우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김태우는 박사논문을 쓰지 못하고 보습학원 국어강사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살며, 그의 삐삐는 거의 울리지 않는다. 가끔 연락오는 선배의 권유로 술자리에 참석하지만, 현실의 삶은 그와 거리가 먼 이야기들 뿐이다.

자,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 모임에서 '누구누구는 어떻게 출세했네', '돈이 어떻네', '사귀는 사람, 결혼..' 운운하는 소리 지겨워해보신 분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코드니까. 그리고, 김태우가 영화 속에서 뇌까리는 대사들 역시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니다. 시를 대학시험 문제로 만든다는 관료적 행태에 격분하고, 왜 살아야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건조한 말투에 동의하는 것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영화의 짧은 러닝타임 내내 반복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김태우는 <애정만세>의 양귀매처럼 서글프게 울어버리는데 난 웃어야할지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영화 속에는 별다른 에피소드도 없다. 김민정(A)과의 사랑(?)은 "이것봐. 우리 서로 코드가 통하잖아"라는 제스추어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코드가 통한다고 우기는 사랑 역시 코드가 통하지 않는 사랑이 존재해야 그렇게 보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코드가 다른 사랑이 영화 속에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둘 사이의 사랑이 설득될 수 있을까. 만약 외부적 상황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면, 둘 사이의 관계를 좀더 운명적으로 혹은 더 섬세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90분 내내 심각한걸까.

한없이 우울한 나락에 빠진 한 어린 중년과 지루한 권태의 늪에 빠진 한 늙은 소녀 사이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 <버스, 정류장>은 <공동경비구역 JSA>,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제작사 명필름이 어떻게 돈을 쉽게 써버릴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사례 같다. 이를테면, 그리 욕먹지 않고 제작편수를 늘릴 수 있는 영화다.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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