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강의실 <서편제> 임권택 감독론 글: 정성일 2001년 08월 04일
관심 있으신 분은 cahiers59@hanmail.net으로 메일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 송화는 결국 남동생과 헤어지는가? 한국 영화에 관한 열 두개의 화두, 첫 번째 마당 남동생이 북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송화는 구성지게 심청가의 한 대목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그 대목은 심청이 돌아와 아비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심청가"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걸 눈 먼 송화가 오랜 우여곡절 끝에 만난 남동생 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한다. 밤 새 북을 두들기고, 노래하던 남동생과 누나는 다음 날 아침 서로 모른 척 인사하고 헤어진다. 첫 번째 질문. 왜 누나와 남동생은 결국 서로 아는 척 하지 않고 헤어지는 것일까? 그 헤어짐이 그저 한국인의 한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한국의 전통적인 예술가들은 상처를 통해서만 승화되는가? 같은 말이지만 승화가 충동에 대한 방어라면, 송화는 무엇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하는 것인가? 송화가 승화시켜 물의 존엄성으로까지 끌어올린 대상은 도대체 무엇일까? 같은 말이지만 송화가 승화시켜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억압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도대체 무엇이 그들 사이를 텔레파시처럼 연결시켰던 것일까? 그 반대의 의미로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의미로) 송화가 오빠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또는 어쩔 수 없이 송화는 헤어짐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깡이 승화는 문제를 제기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때, 여기서 남매의 헤어짐은 무엇을 제기하는 개념일까? <서편제>가 우리를 낯설게 만드는 것은 그네들이 연인이 아니라 남매이기 때문이다. 사실 연인들의 이별이란 얼마나 흔한 일인가? 임권택 영화에서 대부분 진정한 문제는 가족의 관계 안에서 생겨난다. 심지어 이것은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그 어떤 단절,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1962년에 데뷔한 그가 그 자신의 영화적 자아가 생겼다고 말한 첫 번째 영화 <잡초>(1971) 이전의 영화들에서조차 그 흔적을 드러낸다. 또는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자신의 작가로서의 데뷔작이라고 부르는) <왕십리>(1975)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단절의 지점의 불연속성이 임권택의 영화를 뒤쫓는 이들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다.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화를 일정한 시간을 두고 단절시킨다. 그래서 토니 레인즈는 임권택의 영화는 그 어떤 선을 그으면서 나아간다기보다는 일종의 원을 그리면서 그 어떤 주제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그 원을 키워나가거나 그 반대로 중심을 향해서 좁혀 들어온다고 한다. 이 운동의 반복 안에 임권택의 영화가 갖는 의미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그가 아무리 멀리 나아갈 때조차 가족의 자장 바깥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그것은 80년 광주 민주항쟁 이후에 나타난 한국영화의 대부분이 가족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장선우의 영화 속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가족들, 박광수의 영화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 가족, 또는 90년대에 데뷔한 감독들의 영화들에서도 그러하다. 이를테면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거추장스러운 가족, 허진호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곁에 비켜서 있는 가족, 이광모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서 부끄러운 기억 속의 거의 부서져버린 가족) 오히려 가족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끈질기게 거듭해서 다시 돌아오는 실재의 귀환이며, 응답이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관계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표현하고 알린다. 그래서 이제는 거꾸로 임권택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가끔 실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표현에 대해서 모른 체하고 알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실재는 표현되고 알려진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서편제>의 송화와 동호가 아무리 예술의 바탕 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들의 관계가 남매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헤어진다. 거기에는 단지 그것을 한국인의 한이라고 부를 수 없는 원인 안에 있는 구멍이 존재한다. 그 헤어짐은 나쁜 행동이 아니라, 이미-항상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원인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헤어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헤어지는 두 명의 등장인물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같은 두 번째 질문. 송화와 동호의 헤어짐을 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 다음 그것이 한국의 정서라고 말하는 것은 안전한 일이다. 그러나 이 헤어짐은 한국인들에게조차 낯선 것이다. 또는 한국영화에서조차 만나기 쉽지 않은 순간이다. 임권택의 영화만이 남매임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는 것이다. 임권택의 등장인물들을 오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의 인물들은 장선우나 박광수, 또는 홍상수, 허진호의 영화와는 다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점점 더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개념적 인물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일종의 그림자이며, 그 위에 이런 저런 인물을 겹쳐놓은 다음 그 그림자를 따라가면서 그 안에서 자기의 복화술을 만들어낸다. (나를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서로 다른 자리였는데,<박하사탕>의 이창동과 <거짓말>의 장선우가 거의 같은 의미로 "내 영화 속의 등장인물은 아무도 아닐 수 있다. 그건 그냥 한국의 지금을 말하는 정서이거나, 상징일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임권택의 영화는 자기의 주인공들을 만들어내는 바탕에 관심을 돌린다. 그는 언제나 "결국 영화는 인물을 담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감독님의 영화에서 무었을 배우면 되나요"라고 묻자 "사람을 보십시오.그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연출부들과의 이야기에 따르면 임권택감독이 현장에서 영화를 다시 찍는 경우의 대부분은 "배우가 등장인물이 되어줄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그 인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세상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은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임권택으로부터 인물이 스스로 걸어나와 자기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임권택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자기의 인물들을 이미 그 자체로 뼈와 눈물, 살과 웃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좋은 시나리오로 나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보다는 나쁜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을 더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는 "이야기는 편집으로 고칠 수 있지만, 인물은 잘못되면 현장에서도 고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임권택이 영화 안에서 펼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미 그가 만들어낸 인물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화두는 그의 영화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그는 시나리오와 영화가 달라지는 것이다. 또는 좀 더 정확하게 그는 두 번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하나는 시나리오 안에서 그 인물을 살려내면서 상상 안에서 창조하고, 그 다음에는 창조한 인물이 자기의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이 세상이 스스로의 방식으로 움직이면서 그 인물과 이루는 부조화의 총체성 안에서 무언가를 중재하려고 애쓰면서 살고 있는 실재를 재현하는 것이다. 결국 임권택이 끌어들이는 실재는 더도 덜도 아닌 한국이라는 시스템이다. 그 안에서 인물과 세상, 그리고 임권택은 그 윤곽을 붙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은 붙들리지 않는 외부이다. 붙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윤곽이다. 항상 인물을 쫓아가면서 임권택에 관하여 말하는 사토 다다오의 글이 나에게 이상하게 읽히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임권택의 영화는 그 사람이 살아가려는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가를 따라가면서 그 과정의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결국 그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무의미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임권택의 영화는 임권택의 삶과 주인공의 삶,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삶이라는 삼각형의 긴장이 함께 만들어 가는 서로의 삶의 대화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화가 항상 서로 조화로운 것은 아니다. 종종 세상이 주인공을 부수고(<족보>(78), <짝코>(80), <티켓>(86), <씨받이>(86), <아다다>(88), <태백산맥>(94)), 주인공들이 임권택의 대화에 대해 등 돌리거나(<만다라>(80), <길소뜸>(85), <연산일기>(87)), 또는 그 세상에 대해 임권택이 화를 내거나 분노하기 (<길소뜸>(85), <창>(97))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축제>(96)와 <춘향뎐>(2000)은 그의 영화 안에서 예외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들이다. (또는 새로운 단절을 만들어내는 불연속성의 지점이 될 지도 모른다) 임권택은 세상 안에 살면서, 그 안에서 주인공이라는 다른 등장인물과 이야기하려고 하는 영화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주어진 제도의 질서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그래서 질서 자체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걸 정확하게 지적한 사람은 멀리서 <서편제>를 보고 "당신이 눈을 감으면, 판소리의 부드럽고 심원한 노래가 당신의 핏줄 속까지 흐르지만, 그러나 조용한 아침, 수분이 가득한 안개의 나라 한국의 풍요로운 풍경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송화의 운명이다"라고 말한 소피 브르디에이다. 소피 브르디에는 송화가 길을 떠돌고, 남동생이 누나를 찾으려는 동안 임권택은 남한에서 사라져가는 향수를 찾아가는 한편, 그 자신의 시간 속에서 분단된 한국의 가족들에 관한 알레고리를 본다고 말한다. 그 소피 브르디에가 네 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 소녀이며, 그 자신에 관한 어린 시절의 부모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 <침묵의 흔적>을 (미리암 아지자와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또는 그녀가 이 글을 쓰고 난 뒤의 일이다) 그녀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리적으로 분단된 한국인들이 그들만의 문화를 통해 만나려고 하지만, 왜 그녀는 볼 수 없어야"하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한국으로부터 강제적으로 그녀의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프랑스로 떠나가야 했던 소피 브르디에가 <서편제>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그 반대로 한국의 영화 비평가들이 거의 던지지 않은 질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은 남동생이 아니라 누나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슷한 질문은 이미 10년전의 영화에서도 제기된 의문이다. (<서편제>와 마찬가지로 신체의 일부가 불편한) 벙어리인 아다다라는 여자에 관해서 (<서편제>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 <아다다>를 본 다음 문학비평가인 김현은 이 영화에 관해서 단상을 늘어놓다가 불현듯 마지막 사족에 "임권택의 영화에는 가족에게 버림받아 방황하는 인물에 대한 편향이 은연 중에 배어 나온다. 왜?"라고 덧붙인다. 김현이 임권택과 같은 지역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임권택의 영화는 한국영화 안에서도 그 자신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배어있다. 그가 인터뷰에서 "나의 영화에서 가족들에 관한 대목은 아마도 한국적이라기보다는 호남의 정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버림받는 것에 대해서 낯선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누가 왜 버림받는가? 임권택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버림받아 바깥으로 쫓겨나서 방황하는 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여자들이다. 그 반대로 남자들은 나가고 싶어한다. 또는 이미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나갔다가 돌아온다. 이것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읽거나, 아니면 여자들에 대한 임권택 영화의 편향으로 읽는 것은 그 안에 더 깊이 가라앉은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또는 이것은 탐정소설에서 종종 범인들이 추리의 오류를 끌어내기 위해 의미의 과잉해석으로 이끈 잘못된 해답의 필연성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그 반대로 그의 영화 속에서 아버지들이 거의 힘이 없거나, 때로는 영화 속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버림받는 것은 누군가 버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버리는가 라는 질문이 사실상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가 버리는지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버리는 것은 세상과 등장인물 사이에 개입하는 그 어떤 압력이다. 그 압력은 어디서 생성되는 것일까? 결국 임권택은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가족 안에는 바깥에서 만들어져서 지속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있다. 그의 등장인물들이 가족에게 가고 싶지만 여기에는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죽지도 못하고,돌아오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안간힘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 존재의 안간힘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여튼"(이 말이 중요하다) 응답이 온다. 그러나 세상이 보내는 실재의 응답과 그것을 받아 들여야하는 주인공의 삶이 대하는 응답과 그 사이에서 중재하는 임권택의 응답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이 임권택 영화의 찡그림이다.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한 침입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 비대칭의 모순이 벌어진다. 그런데 대부분 문제는 주인공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문제인 것이다. 그 세상의 문제가 주인공 안에 들어와서 사후적으로 그 스스로 일관성을 갖고 일그러진 존재가 되어 머문다. 같은 세 번째 질문. 오랜만에 만난 남매는 만나서 얼싸 안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왜 비정상적인 것이 가능해진 것일까? 그것에 대해서 주막집 천씨는 이미 "그들이 얼싸안고 운우지정마저 나눈 것 같다"고 말한다. 누나와 남동생이 소리하고, 북 치는 것이 마치 그들 사이에서 근친상간을 갖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중적인데. 그 하나는 남매는 실제로는 결코 아는 척 하지 않았으며 서로 호명하지 않고 헤어지는 반면 다른 하나는 (천씨의 상상에 따르면) 이 만남의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이미 만나서 얼싸안았을 뿐만 아니라 마치 근친상간을 나눈 것 같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임권택은 그 안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들 바깥에서 증언하는 천씨처럼 이들로부터 외재적인 자리에 있는 것일까? 그는 어느 자리에도 없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의 진정한 단절은 그 둘 사이에 빈자리가 남겨져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턱을 넘어설 수도 있고, 그냥 바깥에 머물 수도 있다. 여기서 임권택은 결코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이해하는 것은 임권택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종종 자기의 영화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자리를 비워 놓는다. 또는 그의 영화가 이미 주어진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항상 빈 자리를 무리를 해서라도 만들어낸다. <창>의 마지막 장면에서 교통순경에 걸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멈춰 서는데서 영화가 끝나는 순간, 우리들은 그들이 거기 멈춰서 교통순경으로부터 왜 그들이 이야기를 들어야하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을 찾기 힘들어진다. (카메라는 멀리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장군의 아들>(90)에서 교도소에서 나와 걸어가는 김두한을 향해 일본경찰이 불러 세우자 돌아보는 모습에서 정지화면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 호명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해야 한다. <길소뜸>에서 모든 만남이 무의미해지고 텅 빈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면서 멈춰 서는 순간, 우리들은 그 멈춰 선 사건에 대해서 문득 같이 멈춰서야 한다. 그 자리는 결코 협상을 하려는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결코 다 알지 못하게 만들어진 자리이다.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서 해석할 수 있는 권능을 갖지만,동시에 그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능력한 자들이다. 만일 임권택이 그 자리를 염두에 두었다면 아마도 <서편제>에서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는 세상의 실재 속에서 주어진 등장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련된 무능한 재판관을 위한 자리일 것이다. 그 재판관은 예술이라고 이름지어진 판소리를 통하여 이미 만나고 있는 남매가 아직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 위에서 결국 만나야 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그 자리는 실재와 상상 사이에서 승화와 배제를 둘러싼 판결을 내려야 하는 곳이다. 여기서 계속 자리가 마련되는 것은 거기에 일종의 순환이 있기 때문이다. 임권택의 영화가 계속해서 불러내는 등장인물들은 가족 안에서 순환을 반복한다. 실제로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언제나 그의 주인공들은 원인을 가정하는 결과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것이 전혀 다른 영화인 <만다라>와 <장군의 아들>이 같은 임권택의 영화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만다라>의 승려 법운은 집을 나와서 불가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찾아 떠돈다. 그러나 그는 그 깨달음을 어디서 얻어야 할 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절을 떠나서 속세로 내려와 만행을 하는 중이다. 그 만행길에 파계승을 만나고 그와 함께 사창가까지 들어가서 자신의 화두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는 결국 마지막 순간 어머니와의 작별을 통해서 화두에 대한 대답을 얻고 다시 길을 떠난다. <장군의 아들>의 김두한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거지로 자라나서 종로통 주먹패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에게 주위의 등장인물들은 김두한이 거지 출신의 주먹 패거리가 아니라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독립군 장군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법운과 김두한은 아버지가 없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이상한 자리를 차지한다. 법운은 자기의 아버지에 대해서 단 한번도 질문하지 않는다. 김두한은 자기의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는다. 그 둘은 아버지의 자리에 갈 의사가 없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그의 주변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단지 아버지의 자리를 환기시키고, 증상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주인공 그 자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바깥에 있는 낯선 타인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영화 안의 (라캉의 의미에서) 작은 소문자 타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힛치콕 영화의 매거핀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거기 그 자리를 마련하여 주인공과 영화를 보는 나와 임권택 사이에서 중재하는 과정이며, 더 나아가 "내가 아닌데 나 안에 있는 저 낯선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어보는 질문의 구조이다. 그들에게서 주인공과 달리 때로는 욕망에 저항하는 향락(jouissance)에 기꺼이 매달리는 행동을 발견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만다라>에서 법운 옆에 나타난 파계승은 만행길을 이끌면서 그에게 깨우침을 베풀고, 무엇보다도 사창가에 데려가 법운에게 섹스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려고 한다. 파계승은 법운에게 불가에서 지켜야할 것을 파계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유도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안에 사실은 법운이 얻고자하는 것이 있음을 일깨우려고 한다. 그것은 금지 안에 들어가 오류를 범하게 함으로써, 그 반대로 세상에 대한 외상의 지점을 바로 보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왜 외상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실재를 피하려하기 때문에 실재의 외상에 맞추어 세상을 봄으로써 찡그려야할 실재 대신에 세상이 외상을 이루는 것이다. 거기서 피하려는 실재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이미 영화 안에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부재하는 아버지와 깨어진 거울로서의 어머니 사이의 비대칭으로 인해 그를 불가에로 이끈 (그러니까 영화가 이미 시작하기 전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에 대한) 그 과정의 앞에는 어머니가 해야할 의무를 버렸다는 질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질책이어야 하는가? 그 안에 한국사회의 가족제도가 만드는 일그러진 외상이 숨어있는 것이다. 그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파계승이 사창가에 데려가서 보여주는 것에는 아들과 헤어지고 사는 어머니의 새로운 삶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유교적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파계승은 그 자리에서 이미 법운이 찾아가야 할 깨우침이 일그러진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그 만행의 과정 안의 텅 빈 장소이다. 파계승은 정화된 것처럼 어느 시골 산사에서 눈오는 날 새벽에 얼어죽고, 그를 불 태워 화장시킨 다음 어머니를 비로소 만나러 가는 것은 법운이 그 장소를 차지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머니와 헤어지는 장면은 마치 <서편제>에서 누나와 남동생이 충분한 설명 없이 아는 척 하지 않고 헤어지는 것처럼 별다른 설명 없이(그 만남의 장면 중 일부는 만남의 장소 바깥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우리들은 모두 알지 못한다. 종종 임권택은 매우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를 대화의 영역 바깥에 놓음으로써 사운드 트랙을 지워버린다) 불현듯 만나고 헤어진다. 그 헤어짐은 이러한 결정을 이상하게 여기는 영화 바깥의 우리에게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헤어지는 나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었입니까?"라고 물어보는 순간이다. 그 헤어짐의 순간에 우리는 자리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법운은 우리에게 대답하지 않고 이미 등을 돌려 새로운 만행을 떠나는 중이다.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의 주변에 나타난 남자들은 그에게 아버지 김좌진을 불러일으키는 호명장치들이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과 적들은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동원된다. 다른 주먹 패거리를 제쳐두고 지속적으로 김두한을 (그가 독립군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암시를 불러일으키면서) 감시하며 경성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일본인 형사와, 격투의 순간에 나타나 단지 이권 다툼에 불과한 싸움을 향해 이것이 아버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만큼이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친구의 응원과, 그리고 학생 깡패인 신마적이 떠나면서 마지막 순간 김두한에게 "너는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인정-호명이 주기를 갖고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세 가지는 결국은 같은 장치다. 그것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아버지를 다룰 때 이미 아들과의 긴장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아버지는 만들어낸 것이거나, 아니면 아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아버지가 그의 영화 안에서 자진하여 운명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질서 아래 그가 고개 숙였다는 의미이다. 사실상 그 아버지는 세상의 법이 아니며, 권능이 아니며,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들의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존재이며, 아니면 아들이 그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낸 아버지이다. 임권택이 아버지를 다룬 <길소뜸>과 <개벽>에서 그 두 편의 영화가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주제 하에 전혀 다른 주인공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무기력한 아버지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다. 또는 넘어서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 아버지들을 그렇게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세상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는다. 거기 비극을 덧붙이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들이 이버지가 이루려고 했던 그러한 세상을 만들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결국 그러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임권택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임권택에게 등 돌리거나, 그가 하려는 이야기를 못 들은 척 한다. 임권택 자신의 작가적 자아가 세워진 <만다라> 이후 유일한 남자 주인공의 조선조 사극 영화가 <연산일기>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데뷔 이후 15년 동안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주문하는 영화를 만들던" 단절 이전의 시절에 14편의 사극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장르의 영화는 <왕십리> 이후 갑자기 그의 작품 목록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사극으로 돌아올 때에는 여자들이 주인공일 때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84)와 <씨받이>뿐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조선조 오백년간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포악해져서 가장 잔혹한 폭군으로 이름을 남긴 연산군에게 동정을 금치 못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연산군은 스스로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부정하고, 그가 사랑했던 장록수의 품에 안겨 마치 그녀의 아이인 것처럼 어리광을 부린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또는 그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연산일기>는 19세기 서구 유럽의 외디푸스 드라마를 부정하고, 그 안에서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관철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족이 한국 사회 안에서 부서져가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가족은 결코 한국사회의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것은 벌교를 무대로 한국전쟁 중의 이데올로기 논쟁을 다룬 <태백산맥>에서 다시 반복된다. 원작소설에서 첨예한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이끌던 화두가 영화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춘다.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원작 소설에서 다루어진 이데올로기적인 투쟁과 역사의식이 사라져버렸다고 이 영화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에서 소설로 옮겨오면서 그 헤게모니의 강조점이 자리를 이동한 것이다. 그래서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한국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낯설어지게 역사의 맥락을 지우고, 그 자리에 이미 있어온 것에 대한 무효화를 선언해버림으로써 그 자신이 말해온 인본주의에 방점을 내리는 것이다. <태백산맥>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 온 이 모든 것들과 가족 사이의 싸움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좌파와 우파가 아니라 세상과 가족이다. 그리고 그 가족을 내세워 싸우는 사람들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남자들이다. 임권택은 자기가 세상을 다루는 동안 역사를 괄호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또는 한국사회는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여기서 완전히 역사가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남자들이 바로 역사의 증후들인 것은 아닐까? 좀 더 정확하게 그 남자들은 "그것이 있던 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데(Wo es war, soll Ich werden)" 있지 못함으로서 만들어진 증후-인간들(sint-hom(m)e)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이 있어야 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 곳은 항상 가족이다. 적어도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그러하다...... 그것이 여자들을 다룰 때, 다른 방식이지만 결국에는 '동어반복'이 이루어진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다른 한국영화들과 다른 것은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자들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을 볼 때다. 그에게 여자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여자가 어머니이거나, 누나이거나, 누이이거나, 친척이거나, 아니면 아내가 될 때다. (이를테면 장선우의 영화에서 여자는 섹스하는 관계라는 경우를 배제하면, 남자와 아무 사이가 아니다. 또 박광수의 영화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거의 아무 것도 아닌 대상이다.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이미 죽을 것을 알고 있는 남자에게 여자는 자기의 삶의 의미 안의 무의미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홍상수에게 여자는 남자의 나르시시즘의 욕망이 등록된 대상이다. 또는 욕망의 순환을 일시적으로 멈추어 세우는 '팜므 파탈'의 기만이다. 임권택과 반대로 그들의 영화 속의 여자들은 가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임권택의 영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다. 그러나 그 가족은 단순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서 한국사회를 재생산하는 장소일 때 의미를 지닌다. 임권택의 영화를 읽는 것은 한국 사회의 내면을 읽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임권택의 영화는 한국 사회의 미시적 구조를 생산하고, 동시에 임권택의 영화는 한국 사회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의 결과는 같지만, 그 안에서 여자가 주인공의 자리에 있을 때 작동의 방식이 변한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그 작동의 방식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는 같은 구조 안에서 배치의 방법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임권택을 이해하는 것이며, 한국 사회의 배치의 방식을 읽는 것이다. <안개마을>(82)은 산간 벽지의 마을에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한 여자가 그 마을에서 바보로 살아가는 깨철이라는 이상한 남자에 대해서 갖는 의문과 그와의 알 수 없는 섹스를 겪는 이야기다. 그는 정말 바보이거나, 아니면 바보 행세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가 알게 되는 것은 마을의 여자들이 깨철을 통해서 억눌린 성의 욕망을 아무도 모르게(그러나 사실은 서로 알면서도 모른 척 하면서) 풀어간다는 사실이다. 이문열의 소설 <익명의 섬>과 이 소설을 영화화시킨 <안개마을> 사이에서 가장 다른 점은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소설의 사건 바깥에 있는 부분의 생략에 있다. 소설에서 여자의 애인은 지금 베트남에 있다. (그럼으로써 자동적으로 이 소설의 배경은 한국이 베트남에 참전했던 시절로 돌아가며, 이 모든 사건은 어찌되었건 베트남 전의 그림자 아래 놓인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여선생님은 부임해왔기 때문에 애인과 잠시 헤어져있을 뿐이다. 이 이야기 안에서 역사는 사라지고, 장소와 인물만이 남는다. 여자에게는 애인에 대해서 좋은 기억만을 갖는다. 그와의 섹스의 순간을 기억 안에 간직하기 위해 플래쉬 백으로 그것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한국에서는 검열에 의하여 잘려나갔다. 이 영화는 그 결과 두 가지 다른 판본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곁에 없다. 지속적으로 여자 옆에 존재하는 깨철은 그녀의 애인이 그녀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 산골마을까지 오기로 했던 날, 그러나 결국 오지 않아서 실망하여 혼자서 돌아오던 귀가 길에 그녀 앞에 갑자기 나타나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서 갑자기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 섹스가 끝나고 난 다음 깨철은 다시 그녀를 위협하지 못하는 바보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안에서 여자는 배제된 남자와 증후인 남자 둘 사이에서 그 중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을 미룬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그녀가 미루는 것은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의 판단이다. 그녀는 이 판단을 계속 미룬다. 또는 그 둘 모두를 그냥 내버려둔다. 그것이 임권택이 우리에게 자리를 비워주면서 그 자리를 남자가 중심에 있을 때와 여자가 중심에 있을 때 다르게 자리를 비우는 방식이다. 그의 영화에서 배제와 증후는 여자에게 서로 다투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치 그것이 존재의 바탕인 것처럼 그녀를 붙들기 위해 끈질기게 쫓아온다. 그러나 그 자리를 비워놓기 위해 그녀들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임권택 영화의 가혹함이다. 그것은 <길소뜸>의 중심을 이루는 작동 방식이다. 화영은 남북이산가족 찾기의 중계방송을 보면서 과거의 기억에 빠져든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가 돌아가셔서 부모의 친구 집에 머물게 된다. 그 집에서 아들 동진과 사랑에 빠지고, 아직 고등학생인 화영은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동진의 부모는 더 이상 만나지 말고 서로 다른 곳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둘은 다른 곳에서 자라는데 그만 중간에 한국전쟁이 터진다. 둘은 기약 없이 헤어지고, 그 와중에 화영은 아이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서로 다른 상대를 만나 결혼하지만, 그러나 둘은 미련을 갖고 살아간다. 그 둘은 만남의 광장에서 기적적으로 만나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먼 시골까지 여행한다. 그 곳에서 아들이라고 생각되는 남자 석철을 만난다. 그들은 석철이 아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까지 받는다. 검사결과는 의학적으로 두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화영은 그 결과를 부정하고 떠난다. 여기에는 그녀의 선택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과, 자기가 사랑했던 과거의 남자가 있다. 그녀는 결국 자기의 삶이 이미 부서진 것을 알고 있다. (또는 이 영화를 보는 한국의 관객들은 그러한 역사 속을 화영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세상이 얼마나 그녀를 망가트렸는지에 대해서는 이웃과 그들의 부모의 삶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이제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결정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화영이 그 결과를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녀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냥 이미 주어진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마치 아무 일도 안 생긴 것처럼 세상의 질서는 유지되고 진행되어갈 것이다. 그 둘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더 나쁜 것을 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해야 할 자리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그러나 그 판단을 미루기 위해서 그녀는 인연을 끊어내고 죽어야 한다. 그녀가 석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석철과 맺어진 상상적 관계 속에서 어머니로서의 자살을 떠 안는 것이며, 그 부정을 통해서 그녀의 기억 속에 이어져 온 동진과의 상징적 관계에서 이미 가진 성적 관계를 부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상징적 자살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녀가 실재 안에 머물기 위해서 그녀는 두 개의 자살을 고스란히 떠 안아야 한다. 그러나 그 실재는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 또는 그녀로 하여금 이미 주어진 실재 안으로 그녀가 물러나는 것이 이미 주어진 세상의 질서와의 대립 안에서 머무는 길이라는 것을 인정토록 만든다. 그녀에게 한국전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해에 만들어진 <티켓>과 <씨받이>는 같은 영화이다. <티켓>에서 다방 마담은 네 명의 레지들과 항구 도시에 작은 다방을 운영하면서 살아간다. 겉으로는 냉담해 보이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과거의 기억 안에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수소문하여 연락해서 만났더니 그는 이제는 서로 다른 인생이 되었으니 잊으라고 말한다. 마담은 결국 미쳐버린다. <씨받이>는 산골 두메에 태어난 여자가 양반 집에 아들이 없자 씨받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문을 이어야 할 양반 집 아들과 섹스를 해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그녀의 역할은 끝난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과정에서 임신을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 양반 집 아들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아들을 낳고, 그녀는 집을 떠나야 한다.그녀는 집에 돌아와 자살한다. 서로 다른 시대를 무대로 두 편의 영화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도 다르다. 그러나 그녀들은 결국 같은 작동 방식 아래 있다. 마담이 한 명의 남자를 호명하지만, 그러나 그 남자는 대상으로서의 남자와 그녀의 대상 바깥에서 외재하는 남자로 분열되어 두 명의 남자가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자신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는 남자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과는 나쁜 결과이다. 과거 속에 머물면 남자가 떠나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녀가 계속해서 그를 위해 가장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을 모두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위한 가족을 만드는 것은 계속해서 미루어진다. 그녀는 과거 안에서 남편이자 아내이다. 또는 남자는 사실은 이미 텅 빈자리이며. 그녀의 상상 속의 행복한 가정을 위해 만들어진 환타지인 셈이다. 그 반면 현실 속에서 남자는 그녀와 아무 관계도 아니다. 그 둘 사이를 연결짓는 것은 마담의 환상을 연결짓는 불연속적인 총체성이다. 그녀는 이중의 요구를 유지하기 위하여 결국 자기의 대상을 탈락 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자아와 그녀의 욕망의 대상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동일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탈락해야 할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실재를 찡그리고 보아야 한다. 그녀는 미쳐버린 것이다. 그녀가 실재를 찡그리면서 보는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상실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상을 잃어버린 것일까? 여기에 이 영화가 마련한 빈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 들어서서 우리는 마담이 상상적인 상실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 아니면 실재를 외상 지우면서라도 상상적인 대상을 지켜야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해야 한다. 물론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마치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인 것처럼 미친 마담은 두 개의 달걀을 거의 무의미한 동작으로 꺼내 보이면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티켓>과 전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씨받이>는 서로에 대한 보충설명처럼 이루어져 있다. 또는 이러한 작동의 구조가 조선시대에서 지금의 한국에 이르기까지, 봉건제 시대로부터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방식인 것처럼 나타나 있다. <씨받이>에서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 집에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들어온 씨받이와, 그녀가 들어온 이 양반 집안에 모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가문의 문중을 이어야 할 집안에 정작 아버지는 부재하는 인물이다. 그 아버지는 이미 죽어서 이 집안의 제사상에서만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아들은 이미 이 집안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녀는 이 아들과의 섹스에서 임신하기 위해 자기의 처녀를 바쳐야 한다. 씨받이에게 그 남자는 자기의 처녀를 가져간 첫 남자의 흔적이자, 자기의 아들을 가져간 제도 안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안방마님이 아니며, 기를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는 계약관계에 의해서 아들을 낳기 위하여 온 씨받이다. 그녀에게는 두 개의 자리가 있는데(여기서 단 하나의 배치만 바꾸면 이것은 전형적인 한국에서의 순결-임신에 관한 주인-내러티브(master-narrative)이다. 그것은 씨받이라는 계약조건이다) 그녀는 결국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행위가 결국에는 이 영화의 테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전체적인 제도 안에서 지켜야하는 규칙이 어머니로서의 자기의 존재에 대한 위반이 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또는 어머니로서의 위반이 제도를 받아들여야하는 그녀의 존재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결국 그녀는 어머니라는 자기의 상징적 지위를 되찾기 위해서, 그래서 그것이 어머니로서 해야할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의 그녀의 존재는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자살은 제도 안에 빼앗긴 아들을 되찾는 관계의 회복을 위한 상상적인 복원이며, 실재에서의 소멸이라는 서로 모순된 불연속의 총체성을 완성하려고 한다. 여기서 <씨받이>와 <티켓> 모두에서 남자에 대해서 아무런 벌이 가해지지 않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의 영화에서 여자들의 욕망은 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녀들에게는 무언가 잃어버린 대상들이 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그녀들이 노력하면 할수록 그녀들은 어떤 덫과 같은 것에 걸려든다. 그 덫은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인데 그녀들이 자신들의 욕망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갑자기 작동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덫이야말로 그녀들의 존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사실은 이미 그녀들이 잃어버린 대상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여러 개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때, 때로는 상상적인 모습을 하고, 또는 상징적인 관계를 통해서, 가족이라는 순환의 구조 안에서 드러날 때, 그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실재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 균형은 그녀들에게 대가를 요구한다. 그녀들은 사실은 갈 수 없는 자리에 가기 위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정작 그 자리를 만들어내는 세상과 다투어야만 한다. 그 둘 사이의 과잉된 의미가 서로 화해하려는 모습이 장례식을 다루는 <축제>에 나타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 될 것이다. <축제>는 임권택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가족을 중심에 놓고 그 순환을 구심력에 의해 지속시키려는 남자들의 운동과 계속해서 그녀들에게 가족 안의 호명을 일깨우면서 그것을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를 외부에로 밀쳐내고 잡아당기는 원심력의 운동이 서로 겹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장례식이 그 중심에 놓여져 있다. 중년 소설가 준섭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고향에 내려온다. 오랜만에 친척들도 모두 모인다. 여기에 오랜 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가 오랜 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용순도 돌아온다. (우리는 용순의 복장과 화장을 보는 순간 그녀가 술집에서 일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술집에서 일하는 것은 한국에서 매춘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영화는 장례식을 중심에 놓고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으로 전개된다. 그 하나는 준섭이 자기의 딸에게 할머니의 죽음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동화와, 다른 하나는 용순이 방탕했던 큰형의 배다른 딸로 태어나서 푸대접받다가 결국에는 돈을 훔쳐 가출하고 떠돌았던 이야기이다. 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중심을 이루는 장례식은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리이다. 누군가의 자리가 비워지면 그것은 채워져야 한다.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를 다투는 것이다. 준섭의 동화와 용순의 과거에 관한 기억 사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다툼은 그러나 처음부터 이미 결정 나 있는 결과를 고스란히 따른다. 준섭의 이야기는 이미 이 영화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를 이루고 있는 반면, 용순의 이야기는 덧붙여진 영화의 잉여이다. 그 잉여 안에서 용순의 과거라는 이미 일어난 사건은 중섭의 동화 이야기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러나 그 반대로 동화의 이야기와 장례는 서로에 대한 버팀목이다. 장례라는 상징적인 의식과 동화라는 상상의 이야기는 서로에 대해서 의지하고, 서로를 보충한다. 용순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미 지나온 자기의 과거를 버려야 하거나, 아니면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용순은 그것을 망설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족 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가족 사진을 찍는 동안 용순은 그 선택을 망설인다. 그때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우고 중심에 앉아있는 준섭이 용순의 이름을 호명한다. 거기에 대답하고, 그럼으로써 용순은 마치 거기에 용순을 위해 비워놓은 자리가 있는 것처럼 불려가 그 자리를 채운다. 그것은 목적지에 항상 도착하는 (라깡을 경유한) 알튀세의 편지와 같은 의미이다. 이제 남은 자리가 없는 것일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용순이 그 자리를 채움으로서 정작 용순이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우리가 남겨진다. 용순이 그 자리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녀가 정화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용순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녀는 사진을 찍는 동안 실재를 잊고 잠시 상징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상징적인 자리의 균형을 세우지만, 실재는 텅 빈 채 남겨져 있다.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가장 안정되어 보이는 <축제>가 사실은 한국 사회에 대한 가장 불안정한 영화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가 두 개의 중심을 동시에 활용하면서 그 안에서 결국에는 여자 주인공의 자리가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새로운 출발이 될 지, 아니면 그의 영화의 변주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다음 영화가 <창>과 <춘향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임권택이 이미 <서편제>에서 그 마지막 장면에서 '심청가'를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딸이 아비를 구하는 '심청전' 대신 기생의 딸이 첫 순정을 바친 남자를 기다리는 '춘향가'를 찍은 것은 그 노래 대목들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춘향뎐>은 이제까지 임권택의 영화적인 수사학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 바탕을 이루며 디루었던 세상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판본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근본을 이루며 변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기생의 딸로 태어나 첫 약조한 남자가 과거 급제를 위하여 한양에 가자, 그 남자가 돌아올 때까지 새로 부임한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기다리다가 결국 그 남자가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와서 그의 아내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반복하여) 아버지가 없는 춘향에게 두 명의 남자가 다가온다. 그 하나는 이몽룡이고, 다른 한 명은 새로 부임한 사또 변학도이다. 두 남자 사이에서 춘향은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이 판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이상한 것은 춘향가의 가장 중요한 두 대목이라고 불리는 첫 사랑을 나누는 '사랑가'와,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몽룡이 돌아오기는 했으나 (암행어사라는 신분을 속이기 위하여) 거지행색으로 나타나 옥중의 춘향을 만나는 대목에서 부르는 '옥중가'인데, 영화에서는 '옥중가'의 대목을 부르지 않고 대사로 처리하는 순간이다. 이 영화를 판소리 영화로 만들 결심을 하였다면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지 않는다. 왜 부르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일까? 이 영화가 <춘향뎐>이기는 하지만, 임권택은 이 영화의 소리를 남자의 창으로 진행시킨다.(그것에 대해서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사용한 조상현 명창의 소리가 '춘향가를 가장 훌륭하게 불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목은 <춘향뎐>이지만, 사실은 이 영화는 '이몽룡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옥중에서 춘향이 부르는 노래는 이 영화에서 잉여가 되는 것이다. 춘향의 선택은 이미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며, 그녀는 이 결정된 구조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또는 나가는 순간 무의미한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녀의 선택은 일종의 신념과 같은 것인데, 그 신념은 실재에서 아무 것도 약속받지 못한 그녀의 상상 속의 약속이다. 그 실재로 인하여 그녀가 신체적으로 가혹한 대가를 치루고 있는데도,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그래서 차라리 신념을 포기하느니 매를 맞아 죽는 쪽을 택한다. 그녀는 실재의 고통 대신에 상상의 유지를 택한다. 그 자살에 가까운 몸짓은, (만일 이몽룡이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거나, 아니면 과거급제에 실패해서 돌아왔다면) <티켓>에서의 마담이 결국 자신의 상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미쳐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안에 춘향을 버티게 만드는 자기 만족은 원작을 고스란히 유지시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임권택의 다른 영화를 그 안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임권택의 영화가 갖는 뿌리가 지금 살아가는 한국에 그 바탕을 둔 것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 이래 이어져 내려온 가족의 재생산이라는 작동 방식의 바탕 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임권택의 영화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방어가 있다. 그 방어를 위해 가족은 거의 유일한 그의 피신처이다. 또는 그 안에 들어갈 때에만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임권택의 남자 주인공들이 성공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는 반면, 여자들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또는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그녀 스스로 실재를 찡그려 보거나,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건 인연을 끊는다. 그 인연의 소멸은 그녀들에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상징적 인연을 끊거나, 실재와의 인연을 끊는 방식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임권택과 세상과 그의 등장인물들에게는 그 사이에 불연속의 총체성으로 가장된 상태의 균형이 생겨난다. 그 균형 안에 항상 이것을 유지하는 빈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 빈 자리는 동시에 일종의 채워져야 하는 구멍이다. 그 빈자리는 동시에 구멍이기 때문에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그 사이를 오가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시키려는 일관성의 법칙을 부여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마치 있지 않은 것처럼 부정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부정을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호명하는 잘못의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바깥에서 부정할 때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안에서 부정해야 하는데, 안에서 부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정을 수행할 때에만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수행은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영화 안에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정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불리워져 간 순간, 주인공에게 빚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는 길은 빚을 떼먹는 도리밖에 없다. 주인공이 넘긴 것을 떼먹거나, 아니면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주인공에 대한 부채를 지거나, 아니면 세상에 대한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이것은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여기에는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 어떤 전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죄의식의 전이이다.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우리들의 자리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지고, 그 안에서 거기 없는 무엇이 우리에게 왜 임권택과 세상과 주인공이 서로 한자리에 만나기 위해서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물어본다. 그 질문에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대답의 불가능성 안에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의 영화는 알게 만든다. 빈자리는 이중장부의 자리이다. 그 장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에게 셈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셈을 미룰 것이며, 그러면 점점 더 이자는 불어날 것이다. 그 이자만큼 세상은 부서지는 것이다. 또는 그만큼 우리들은 실재를 찡그려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남동생이 북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송화는 구성지게 심청가의 한 대목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그 대목은 심청이 돌아와 아비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심청가'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걸 눈 먼 송화가 오랜 우여곡절 끝에 만난 남동생 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한다. 밤 새 북을 두들기고, 노래하던 남동생과 누나는 다음 날 아침 서로 모른 척하고 헤어진다. 같은 네번째 질문. 우리는 그 중 누구를 쫓아가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남동생의 자리에서 송화를 떠나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송화와 함께 떠나는 것일까? 그 어느 쪽에도 우리의 자리는 없다. 좀 더 정확하게 우리는 그 대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우리의 자리는 그녀가 가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죄의식 안에 있기 때문이다. 송화는 우리들의 죄의 전이이다. 아버지에 의해서 눈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떠나간 남동생을 그리워하면서 여기저기를 떠도는 동안 그녀의 노래가 한을 더해 깊이가 생겼다는 말은 그녀 자신을 유지하는 방어의 다른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녀의 비극을 거부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우리의 환상이며, 그럼으로써 그녀를 우리와 연관지을 수 있는 대상으로부터 연관지을 수 없는 물에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해 판소리라는 점점 사라져 가는 전통적인 문화의 흔적인 소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의해 전수되는 소리가, 그녀의 존재를 숭고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송화는 숭고하지만, 그러나 목적이 없는 대상의 자리에 머문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숭고함이 우리가 스스로의 자리에 주어진 죄의식을 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비극인 까닭은 그 대상이 완전하게 승화되지 않고 남는 잉여가 있기 때문이다. 송화는 실재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됨으로써, 그녀는 세상 안에 있지만 실재에 대해서 바깥에 있는 이중의 자리에 놓인다. 더 이상 상상 안에 있지도 아니하며, 동시에 상징적인 관계로부터도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녀가 완전히 실재에로 눈 뜰 수 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은 그녀의 행위가 온통 비합리적이고 이성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가 우리들의 세상의 바깥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세상의 바깥은 동시에 그 어디도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 안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내리는 판단이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잘못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야 하는가? 그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것이 우리의 자리가 죄의 전이를 짊어져야 하는 이유이다. 송화의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야 하는 소리를 전수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소리가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아버지의 자리에 가야 한다. 또는 그렇게 강요당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자리에 갈 수 없다. 소리는 아버지로부터 송화에게로 옮겨지지만, 그러나 관계마저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 남동생은 아버지의 자리에서 누나를 찾는다. (남동생이 떠나간 다음 천씨가 물어보자 송화는 대답한다. “제 소리가 저 사람의 북 장단을 만났을 때 대번에 동생인지 알아챘지요. 옛날 제 아비 솜씨 그대로였어요”) 송화는 소리의 육신이며, 그 육신은 소리의 흔적이다. 그녀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소리를 전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송화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자리에 우리가 비어진 구멍을 채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리를 실현하는 것은 세상에서 잃어버린 대상을 향해 던진 질문이 계속해서 대답을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최상의 소리라는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만이 있는 것이다. 숭고함이 언제나 미루어진 대상이 될 때, 그것을 담는 육신은 불가능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또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 잉여의 흔적이다. 흔적은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나, 아니면 그의 남동생에게 그 무언가를 유지하고, 그 무언가로부터 방어하고, 그 무언가에게 빌려주는 대상의 원인이라는 과정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채워야 한다. 또는 그것은 한국의 바탕을 이루는 실재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 바탕에 살고 있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로부터의 죄의식의 전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