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이미지의 안과 밖: 의미의 생성효과를 찾아서
글: 박현선
2000년 02월 01일
1.
답답한 현실세계에 갇힌 인간들은 상상 속의 두려움을 갈망하는 것일까. SF, 스릴러, 호러, 판타지와 같은 장르들이 9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에서 비중 있는 장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근년도에 등장한 한국의 공포영화들은 과거의 주된 소재였던 민담과 전설, 미신의 문화적인 유산이나 또는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것 등에서 현실사회에 대한 우회로로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손톱>, <구미호>, <올가미>,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퇴마록> 등은 이 돌출적인 현상의 흐름을 이루는 영화들이다.
그런데 90년대의 공포는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에 근대화와 더불어 기존의 낡은 문화적인 질서가 붕괴되면서 야기된 불안감의 투사와는 다른 사회적 컨텍스트를 지닌다. 한 때 '근대화'의 논리를 앞세우며 전사회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면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슬로건은 '세계화'와 '지방화', '정보화'로 요약된다. 농경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이행이 과거를 비추는 거울을 통해 보여진다면 이제 도시와 도시를 가로지르는 전지구적인 통합과 분권이 현재와 미래의 거울에 반사된다. 사회경제적 발전의 불균등 속에서 다국적 자본주의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편, 진리, 현실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불확정성이 인간의 사고를 짓누르는 상황은 아무리 사회구조의 가장자리에 속한 주체들이라 할지라도 변화와 탈안정화의 길을 걷도록 강제하고 있다.
장르영화가 대중의 무의식적인 긴장이나 분위기에 대한 하나의 지표로서 존재한다는 가정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장르의 주제들이 동시대 삶의 감수성이 재구성되는 지점에서 함께 균열을 일으킨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균열은 장르의 혼합을 통해 극복을 시도하기도 한다. 위에 언급한 일련의 작품들은 이같은 혼합과 해체를 주도하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공포영화 장르의 관습과 규칙들에 충실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 장르로 분류될 것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손톱>과 <올가미>,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구미호>와 <퇴마록> 등은 공포영화와 다른 장르의 관습을 조합하고 이탈하면서 독특한 혼성장르의 모양새를 형성한다.
김성홍의 두 영화 <손톱>과 <올가미>를 살펴보자. 이들은 강박적인 심리나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한 인간에 대해 묘사하면서 사이코 스릴러 형식을 이용한다.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만한 어둡고 위협적이고 좁은 세계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과 닫혀진 방으로 조직된다. 그리고 그 차갑고 검푸른 실내에는 썩는 시체의 냄새 또는 타는 살의 냄새가 새겨 넣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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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쓴 청소년 학원물 <여고괴담>은 학교라는 공간에 담긴 양가성 - 전인적인 어른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양지와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들을 폐기되어 버려진 음지 - 를 이야기한다. 양지와 음지의 양면 속에서도 영화의 구심점은 교사의 차별과 친구들로부터의 따돌림에 괴롭힘 당했던 진주라는 아이다. 그녀에게 초자연성을 부여하고 괴물로 변신시킨 것은 사회집단에 동참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욕구와 그들에 대한 복수의 심리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들에 담긴 공포와 더 이상 확고하지 않은 사회의 가치관은 서로 음모하여 작품의 주제를 형성한다. 가족구조의 해체에서 오는 갈등, 사회구조의 이면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조롱, 억압적인 학교교육제도에 대한 일종의 복수 등이 공포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다. 7-80년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대중적이었던 장르의 하나였던 공포영화가 그랬듯이(마이클 라이언·더글라스 켈너, 『카메라 폴리티카 (하)』, 백문임·조만영 옮김, 시각과 언어, 1997, p.15. "그러나 공포영화의 은유는 문화가 직접적으로 다룰 수 없는 불안감을 표현하는 매개물을 제공하는 동시에 헐리우드 주류영화가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사회비판을 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공포영화의 사회비판적 측면은 헐리우드와는 다른 층위에서 드러난다.), 사회경제적인 위기의식은 불안과 두려움, 조롱과 아이러니, 강박관념과 복수심이라는 미명으로 9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에서 재현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 사이에도 균열은 있다. <구미호>와 <퇴마록>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지표를 가리킨다. 그것은 사회적인 컨텍스트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사회구조의 토대 자체에 말걸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구미호와 부활하고자 하는 악령은 인간 대 자연 또는 이성 대 광기의 이분법적 관계로부터 인간과 자연, 이성과 광기라는 교환적인 관계를 암시함으로써 정상적인 인간의 삶에 침투해 들어온다. 우리들의 정체성, 과거, 미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약속하기 위해서 이 영화들에서 공포의 물질적인 기표가 성공적으로 제거되는 결말은 따라서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미호>나 <퇴마록>이 여타의 영화들과 다른 계보를 그리게 되는 요인이 존재한다. 전자와 후자의 사이에서 경계를 긋는 것은 바로 '테크놀로지 이미지'이다. <올가미>,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등에서 공포가 다가오는 방식은 <여고괴담>의 한 장면에서 진주가 빠른 커팅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던 방식으로 축약할 수 있다. 필름이라는 원재료에 아날로그적인 지시대상들이 기록되고 그 기록의 투명함이 편집에 의해 또는 다른 영화적 기법들에 의해 불투명한 왜곡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아날로그적인 리듬과 기법에 의존해서 공포를 유발하는 효과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구미호>나 <퇴마록>등의 이미지는 카메라 앞에 현존하던 지시대상이 사라진 채 새로이 디지털적으로 합성되는 방식의 테크놀로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2.
이 글은 올 한해동안 한국영화의 특징적인 경향으로써 등장한 호러영화들이 디지털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축으로 계보를 그리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 한 축은 <올가미>,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등과 같이 서사구조의 상대적인 강조와 아날로그 이미지의 전통을 잇는 영화들이다. 그리고 <구미호>의 계보를 잇는 <퇴마록>과 같은 영화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 영화들이다. 여기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CGI (Computer-generated Image)는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진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영화담론의 새로운 문제설정과 관계하는 것이기에 <퇴마록>의 디지털 이미지들이 갖는 생성효과에 주목하고자 한다.
처음에 한국영화에 디지털 특수효과가 도입된 것은 <구미호>(94)에서 여주인공의 얼굴이 여우의 형상으로 바뀌는 장면이다.(「충무로 CG시대 가는가?」, 『씨네21』, 제152호, 1998. 영화산업적인 측면에서 한국영화의 특수효과가 어떤 수준에 이르렀는지 살펴볼 때, 미니어춰, 특수촬영, 스톱모션, 로보스틱 등 특수효과 수준은 아직 유아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디지털 합성에 관한 한 국내의 기술력은 헐리우드에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흥미롭게도, 교차흡수기법(cross-dissolving technique) 혹은 모핑(morphing)이라고 불리우는 이 시각적인 전이효과가 세계적으로 처음 등장하게 된 장면 역시 <늑대 인간>(The Wolf Man, 1941)에서 사람이 늑대로 변하는 연속장면이었다고 한다.(『비주얼 커뮤니케이션』, 금동호·김성민 옮김, 나남신서, 1996, p.573.) <구미호>는 모핑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이미지들을 고무처럼 자유자재로 처리하였다. 모핑기법 이외에도 이 영화는 저승의 기차역 장면에서 앞부분을 세트에서 촬영하고 후경은 그 그림을 복사해서 규모 있고 반복되는 느낌으로 배치하였다. 이렇게 실제 로케이션이 돈이 많이 들고 촬영에 제약이 따르는 경우에 이런 문제는 기술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같은 맥락에서 최근에 CGI가 쓰인 한국영화는 <초록물고기>, <비트>, <넘버3>, <접속>, <패자부활전>, <창>, <찜> 등으로 스카프가 날아가는 장면이라든가 지하철에 사람이 뛰어드는 장면, 배경 주위의 풍경을 혼합시키는 것 등이 모두 컴퓨터 합성 이미지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퇴마록>의 경우, 단순히 경제논리에 의해 CGI를 구성하는 단계를 넘어섰다. 이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된 장면은 모두 8분이다. 게임 캐릭터를 현실로 불러내서 결투를 신청하는 장면이나 월향검이 날아 다니는 화면, 악령들이 등장인물을 결박하는 장면 등은 초현실적이며 악마적인 정령이 인간의 몸을 빌어 등장하는 공포장르에 멜로적인 요소를 가미한 이 영화로부터 환상과 스펙터클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끄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상기시킨다.
이런 가능성은 아날로그 부호화와 디지털 부호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에너지의 파장에 따라 생겨나는 정보와 장면들은 돌을 물에 던졌을 때 일어나는 물결과 같은 방식으로 퍼져 나간다. 반면, 디지털 화상을 만들기 위해서 아날로그 방식의 화상은 픽슬 그리드(grid)나 화상요소로 쪼갠 후에 각 픽슬에 해당되는 위치와 밝기를 표시하는 숫자를 할당하는 방식을 취한다.(『디지털 사진』, 김성민 엮음, 눈빛, 1998, pp.30-33.) 마크 포스터에 따르면, 아날로그 부호화는 물질 형태의 직접적인 모방으로서 대상물의 미세한 변이를 연속적으로 모방하는 반면, 디지털 부호화는 정보를 이진법의 논리에 맞추어 조정하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지시 대상을 재현하거나 모방하지 않는다.(심광현, 『탈근대 문화정치와 문화연구』, 문화과학사, 1998, p.264.)
사진찍힐 수 없는 사물들의 생생한 사진적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퇴마록>과 같은 영화들에서 컴퓨터 이미지의 가능성은 영화이론에서 구축돼 온 리얼리즘과 영화에 대한 전통적인 가설들에 도전한다. CGI는 지각적이고 사회적인 인지에 기반한 대안적인 모델을 발전시키는데 이 모델은 영화이론에서 리얼리즘과 형식주의 사이의 전통에 대한 보다 나은 통합을 생산하는 듯 하다.
전통적으로 영화적 리얼리즘에 대한 접근은 영화가 사진적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이론가들은 사진적 기호의 도상적 상태와 연결시켜서 그 개념을 발전시켰다. 앙드레 바쟁은 그의 리얼리즘적 미학을 그가 '사진의 객관적 본질'이라 간주한 것 위에 정초하였는데, 이때 "사진적 이미지는 대상 그 자체, 그것을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의 상태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이다."(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옮김, 시각과 언어, 1998, p.13.)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물리적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영화가 본질적으로 사진의 확장이며 따라서 우리를 둘러싼 가시적 세계에 대한 확신을 사진과 함께 공유한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들은 인과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지시대상과 연결된다.
그러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환영적이며 현실효과를 구성한다. 컴퓨터에서 시뮬레이트된 조명의 예와 같이, 광원은 필요치 않으며 그림자는 존재하는 조명의 위치와 상관없이 채색되어지는 것이다. 사진에서 노출과 결과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연관되는 조명은 컴퓨터 이미지에서는 엄격하게 개별적인 화상요소들의 명암과 배색을 변화시키는 채색의 문제다.(Stephan Prince,「True Lies : Perceptual Realism, Digital Images, and Film Theory」, 『Film Quarterly』 Volume 49 Number 3, Spring 1996, p.35.) 결과적으로 CGI에서 조명은 고정되고 엄격한 물리적 상황들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트루 라이즈(True Lies)>,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와 같은 영화들에서 현실의 확장을 위해 사용된 테크놀로지를 지각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틀로 조망하고 있는 스테판 프린스는 디지털 이미지가 카메라와 전영화적 사건들 양자를 포함하는 필수적인 관계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퇴마록>의 관객은 카메라 렌즈 앞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시각적으로 인지가능한 결계나 괴물등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화 외적인 경험을 끌어들인다. 영화가 사실적이냐 형식적이냐를 질문하는 대신 가상적인 이미지들을 우리 스스로의 3차원적 세계에서 시각적이고 사회적인 경험들과 연결시키는 방식들에 대해 주목할 수 있다. 동시에 영화와 관객이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설정 역시 달라질 수 있는데 영화를 통해서 생산되는 의미와 관객에 의해서 해석되는 의미는 같은 층위에서 마주보고 있다기보다는 약간 어긋난 층위에서 비껴 서있는 관계가 생겨난다.
3.
사진적 리얼리즘에서와는 달리, 새로운 생산방식이 창조한 이미지는 고정된 기호작용으로 한정되기보다는 열린 기호작용을 가능하게 만든다. 영화가 '현실에 대한 재현이나 반영'으로서의 텍스트라는 관점을 넘어서서 '현실에 대한 관객의 새로운 경험'을 생산하는 전망이 생성될 수 있다. 정체성의 범주에서 바라볼 때에 버추얼 이미지와 가상현실을 내포하고 있는 테크놀로지는 페미니즘 SF와 같은 계열의 영화들에서 불안정한 범주들로 실험을 하게 만들었다. 페미니즘 이론가로서 여성이 여신보다는 사이보그로 재구성되기를 주장하는 다나 해러웨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현실과 가상, 본질과 현상, 리얼리티와 모조물 사이에 경계가 붕괴되고 서로 범람하는 한편, 우리가 스스로 자신이라 믿었던 정체를 위협함으로써 그 이면에 새로운 정체성이 서서히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Donna Haraway, 「A Manifesto For Cybogs」, Stanley Arnowitz 외, 『Technoscience and Cyberculture』, Routledge, 1996) 경계의 혼란으로 인해 정체성이란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인식이 생겨나서 성별, 인종, 계급 등이 '본질적인' 통합성을 지닌다는 믿음은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을 자연스럽게 결속시키는 여성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SF영화들 대부분의 경우에, 테크놀로지는 성차화된 용어로 개념화하는 방식들 사이에 갈등을 나타내면서도 현재의 성차 스테레오 타입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심지어 강화하는 고정성을 보이게 된다. 즉, 남성 대 여성, 그리고 선 대 악의 은유에 대립한다.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은 무장을 갖추는 것과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함의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반복을 거듭해 왔는데, <퇴마록>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퇴마록>에서 보이지 않는 악령의 존재는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막강한 인간으로 표상되며 그들의 육체는 요새화된 집합을 이루어 승희의 자궁 - 어머니 - 을 포획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남근적 사이보그는 현대 전자 테크놀로지에 대한 은유와 대립되는데 그것은 감춰졌으며 수동적이고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테크놀로지가 회피하기 어려운 '여성화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클라우디아 스프링거, 『사이버 에로스』, 정준영 옮김, 한나래, 1998, p.146.) 한편으로, 정체성의 재구성에 대한 억압은 무엇보다 권력이 대중의 욕망을 통제하고 집중화하기 위해 이용하는 지배적 표상을 존중하도록 하는 데 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승희는 악령이 들리고 요염한 팜므 파탈의 여성으로서 세상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순결하고 봉인된 여성 이미지인 월향검에 찔릴 것을 선택한다. 사랑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승희가 평범한 여성으로 봉합되는 과정에서 영화에 등장한 주요 캐릭터들이 차례차례 오버랩되면서 묵종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렇지만 억압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사회적 토대의 불안정성을 암시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마이클 라이언이 헐리우드의 대중적인 장르영화를 분석하면서 끊임없이 표층적인 의미에 동전의 양면처럼 달라붙어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뒤집어 보이려 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퇴마록>를 독해하는 데 있어 이중적인 의미 구조를 더욱 확장시키는 요인은 이 글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이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면서 이 영화는 세 가지 변별적인 표상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 전자오락게임에서 빠져나온 괴물, 둘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악령의 존재를 나타내는 추상적인 형상들과 파편화된 신체들, 그리고 세째는 현암과 동반자적 위치에 있는 월향검이다. 이 세 가지 표상들은 영화 내에서 각기 다른 효과를 던져주고 있는데 그 범위는 생산자의 의도의 안과 밖에 흩어져 있다. 우선, 아이와 싸움을 벌이는 전자오락게임의 괴물은 컴퓨터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이미지로써 영화의 초반부에서 관객의 흥미와 기대를 자극하고 가상현실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촉매제와 같은 효과를 낳는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객의 흥미와 기대를 유발시키는 이 시퀀스에서 영화제작자는 일종의 자신감을, 한국영화의 관람자들은 예상치 못한 만족감을 교환하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형성된 기대치는 이후에 악령의 존재가 전자오락게임의 괴물에 비해서 훨씬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형상화되었던 영화적,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뢰할 만한 무게감과 위압감을 던져주게 된다. 물론 악령의 디지털 이미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공포스런 현장으로의 진입과정, 그리고 내러티브 상에서 플래쉬 백되는 광신도들의 배교행위와 집단자살 장면에서의 두려움과 공포감에 공모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두 가지 표상들이 생산자의 의도 안에 위치지워져 있다면 세 번째 예를 든 월향검의 디지털 표상은 생산자의 의도 밖에 존재하며 <퇴마록>의 균질성에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악령이나 악귀들에 대항하여 그들을 응징하는 존재로서 월향검은 차갑고 견고한 무기이다. 동시에 흐릿한 선과 색으로 빛을 발하며 달빛의 존재를 아로새기는 여성 이미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디지털 테크놀로지이다. 이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특징들이 현암과 승희의 이성애적 관계설정 사이로 잠입해 들어온다. 이런 효과들은 현암이 승희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월향검을 자신의 몸 속에 삽입시키는 CGI 장면에서 의미의 다층성을 야기한다. 남성적 무기를 자신의 신체 안에 담아 가짐으로써 한계에 다다른 능력을 배가시키려는 것이 현암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성의 표상으로서 월향검은 현암의 남성성 내부로 침투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확고해 보이던 이분법적 주체성의 문제는 이렇게 양가적이고 모순적으로 재설정되는 틈을 통해 탈중심화되는 것이다.
4.
위에서 논의한 대로 과거의 아날로그 이미지들이 현실을 마주 대하거나 현실에 비껴서 있었던 것으로 간주되었던 데 반해 새로운 이미지는 의미효과를 재구성하는 현실이 된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의 새로운 미학적 특질이 지배적인 감수성이 될 경우, 종래의 아날로그적 특질은 퇴행적인 감수성으로 치부되어야 할 것인가? 그럴 경우에 디지털적인 것을 진보로 보고 아날로그적이며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퇴행적인 것으로 볼 위험은 없는가?"(심광현, 위의 책, p.314.)라는 질문이 던져질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지점은 과거의 아날로그 이미지와 미래의 디지털 이미지 자체가 서로를 새롭게 대체하는 관계로 고정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부호화라는 메커니즘을 거친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아날로그적인 텍스트와 연결됨으로써만 의미를 생산하고 확장할 수 있다. 앞에서 설정한 두 가지 축의 영화들 역시 사실은 여러 가지 방식들이 "울퉁불퉁하게 짜기워져 있는 가시적 세계의 총합"으로 복합적인 텍스트들이다. <올가미>,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등도 그 이미지를 생산하며 수용하는 다수의 시선과 응시들에 의해 상징적이고 도상적인 기호로서 또는 관객의 지각과 연관된 지표적인 기호로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영화 매체에 있어서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이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도입에 의해 자극을 받고 균열을 일으키며 새로운 생성효과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이때 테크놀로지는 텍스트와 서로 상호적인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단순히 다의미층의 가능성을 형성하는 디지털 이미지만이 영화텍스트 내에서 새로운 담론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하나의 테크놀로지는 텍스트 형식적인 표층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이면에서 의미구조를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사용함으로써 형성된 이미지들은 현실의 리얼리티 창조에만 그 효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과 공간, 다른 차원의 해석을 열어둔다. 관객들은 가상의 공간과 표상들을 영화적으로 체험하고 표상의 틈새로 분출되는 다양한 의미들을 즐기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들 속에서 우리들은 자신의 구조적인 경험을 영화에 투영하기도 하지만 의미의 통로를 통해서 자신의 경험적 구조를 재구성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중의 절합구조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영화에 던져주는 역동성을 가치있게 한다. 관객의 지각과 정체성의 변화가 '현재 시간에 충만한 역사적 구성물'로서 테크놀로지 담론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필자 박현선은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석사과정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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