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영화에 대하여
글: 이효인
1999년 10월 01일
변방의 변방에서, 아마추어에서 작가까지(1994-1995)
1. 독립 영화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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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구체적으로 질문하자. 왜, 무엇에 대하여, 어떻게 시위를 한 것일까?
1996년까지 진행되어온 한국 독립 영화에 대한 정리 및 자료는 {변방에서 중심으로}(서울영상집단 엮음, 시각과 언어, 1996)에 거의 실려 있다. 이 귀중한 작업은 한국 독립 영화들의 역사를 객관적인 자료와 주관적인 주장 그리고 독립영화에 대한 각종 매체의 자료들을 통하여 여러 차원에서 정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변방에서 중심으로}을 통하여 위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독립 영화의 다양한 모습만큼 그 답 또한 다양할 것이다. 또 하나 참고할 것은 졸고 [정치와 아마추어리즘에서 미학으로, 1990년대 독립영화에 대하여]({리뷰} 15, 1998, 여름호)이다. 이 글은 1996년 전후에 나온 십여편의 단편 영화들을 리뷰한 것인데, 독립영화의 변모들을 살펴보면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입장에서 몇 가지들을 지적한 것이다. 이 글은 충무로 영화가 그러하듯 독립 영화도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 것이었고, 또 독립 영화의 어떤 경향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보다는 1995년 전후의 독립 영화들을 또다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당시의 경향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현재의 독립 영화에 대한 돌출적인 회의나 근본주의적이며 완고한 비판이 여태까지 쌓아온 흔적들을 무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돌출적인 회의라는 것은 독립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길을 찾기보다는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논의를 단절시키려는 기도를 가진 주장을 말하며, 근본주의적이며 완고한 비판이라는 것은 독립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리의 독점화를 기도하는 주장을 말한다.
물론 고정 관념을 뒤집어 보는 반성적 태도는 예술가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또 그만큼 이념도 필요하며, 현실적 대응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독립 영화의 존재 조건이 충무로 영화보다 덜 상업적이며 덜 권력적이고, 또 충무로 영화보다는 더 전투적일 수 있고 더 가치 전복적일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독립 영화가 처한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무로 영화보다는 한국 영화의 긍정적 정체성을 실현하는데 유리하며, 충무로 영화보다는 더 현대적인 영화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영화의 긍정적 정체성과 현대적인 영화라는 개념은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 논의를 위해 독립 영화는 작은 논의에 충실해야 하며, 그 논의의 과정 또는 결과는 '인디 포럼 96' 등의 시위 형태로 제시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 시위는 확연한 주제와 행동 노선을 가진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얻어맞을 각오를 충분히 하면서도 최소한 자신의 작업을 공식화하는 그런 것이었다.
( 이 글이 다루고 있는 대상은 1994년과 1995년에 나온 독립 영화들이다. 그러나 간혹 1996년 작품이 거론되는 것은 [인디 포럼 '96]에 참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언급은 필자의 역량 문제로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며, 드라마와 실험 영화들 역시 대체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말로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싶다. 따라서 이 글이 거론하는 작품에 어떤 명예나 불명예가 주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단지 독립영화계의 작업들을 되돌아보면서 어떤 틀로서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를 시도한 글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2. 충무로와 대학로 사이에서
4회에 그치긴 했지만 서울단편영화제 수상작의 성과와 관련 작품들의 생산량 및 열기는 한국 독립 영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 이 영화제가 없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독립 영화 제작 환경의 개선도 더 늦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제의 수상작을 만든 감독들은 충무로 실습이라는 절차를 밟지 않고도 감독으로 데뷰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였다.
비록 데뷰 감독들의 숫자에 비해 비율이 높은 것은 아니었고, 그 방식에 대해 현재의 독립 영화인 모두가 흔쾌히 동의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제작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큰 것이었다.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한 감독들의 충무로 작업과 그러한 지향 그리고 다른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다 더 주목을 받았던 감독들의 충무로 지향 경향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인디 포험 '96}에 실린 몇몇 단체들은 충무로 영화 제작 방식과 다른 대안적 시스템을 지향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독립 영화들이 노골적으로 충무로 지향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충무로 영화와 독립 영화 간의 적대감이라든가 엄격한 경계가 사라진 것도 인정해야 한다. 과거 서울영화집단 출신 대부분이 80년대 말과 90년대에 걸쳐서 충무로에서 작업을 했듯이, 그것은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과 유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엷어진 그러한 경계와 교류를 예로 들면서 충무로 영화와 독립 영화가 차이가 없다고 말하거나, 독립 영화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일이다.
<나쁜 시절>(염정석 / 1994)은 우선 90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으로 충무로 지향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그는 '어떤 사건'과 권총이라는 모티브로 장르적 태도를 취한다. 또 이 영화는 거칠며 부분적으로는 레오 카락스에게도 빚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권태에 빠진 주인공들의 비상투성, 피사체에 대한 황망한 시선, 출구없는 현실 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색채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만약 충무로 상업영화의 규칙을 어느 정도만 준수한다면 긴 영화를 소화할 수 있는 역량과 독창성 그리고 고유한 영상적 심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이 영화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편에서 보면 '영화' 같고 충무로 영화의 편에서 보면 난해하고 고집센 '독립 작가 영화'처럼 보인다.
<나쁜 시절>이 위험했던 영화라면 <슬픈 열대>(육상효 / 1994)는 참으로 안전한 영화였다. 재치있는 인물 설정과 상황 전개 그리고 단편 영화다운 깔끔한 기승전결은, 당시 로맨틱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었던 충무로가 보기에도 상큼한 영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재능을 증명하는 이상은 아니었다.
이 두 영화의 가운데를 뚫고 지나간 영화는 <사로>(정지우 / 1994)였다. <나쁜 시절>이 무정형의 사적 영화라면 <슬픈 열대>는 정형화되고 사적인 단편 장르 영화에 가깝다. 반면 <사로>는 보다 공적이다. 배고픈 범인과 죽은 가난한 할머니라는 인물 설정이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는 감독의 관심을 보여준다. 물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가치 평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로>는 아주 짧은 시간 속에서 표현해야 할 것에 대한 연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그것이 이른바 명작들을 오마쥬한 것인지는 확언할 수 않지만, 재능과 사적인 관심을 드러내는 대신 공적인 것에 대한 공적인 표현으로 자신을 다지고 있다. 이 영화가 충무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단편영화치고 무색무취하며, 지나치게 공식적인 표현을 지향한다는 점에 의해서이다.
<어머니>(박동훈 / 1994)는 한 무기 징역수와 그 방에 같이 수감된 15년 형을 받은 다른 죄수, 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인간관계에 대한 영화다. 주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은 두 사람의 관계와 그 변화에 대한 것인데, 그 변화의 계기들이 섬세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충무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상황을 설정하는 방식과 드라마를 끌어가는 방식 등이 주류 영화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투적이라는 맥락에서도 그러하지만 실습적인 단편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성과 오도된 실험성 등 여러 부정적인 편향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로>의 방식처럼 보이지만 <슬픈 열대>처럼 정형화된 틀을 구사하고 있으며, 동시에 <나쁜 시절>처럼 부분적으로는 새로움을 지닌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창 이야기>(곽경택 / 1995) 역시 감옥을 공간으로 하고 있다. 다만 군 영창에서 죄인들을 다루는 말년 병장과 가정 파괴범으로 들어온 범죄 군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점이 다르다. 감독은 가정파괴범 내면에 숨겨진 흉악함 이외의 또다른 무엇을 다루면서 그 병장이 장교에게 근무 태만으로 지적을 받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장편 영화를 22분 길이의 단편으로 만드는 모범을 보인 셈이다.
일면 충무로를 향하고 있는 이 영화들이 충무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확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두 가지 맥락, 하나는 이 영화들이 충무로 영화에 새로운 피를 수혈할 재능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영화들을 비롯한 많은 단편 영화 감독들이 처해있는 난감한 위치를 확인하는 맥락이다. 그러므로 독립 영화 감독들이 처해 있는 난감한 위치를 다시 살펴보는 차원에서 읽혔으면 한다. 이 난감한 위치는 영화 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난감한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독립 영화의 정체성을 찾아나서야 한다.
3. 동사에서 형용사로
한국 독립영화의 정의를 내리기 힘든 것은 이것들이 과거에 비해 다양한 경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많다. 이 진단 속에는 어떤 공통된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데 대한 조바심이 자리잡고 있거나 또는 무엇이든 개념화하려는, 자연스런 욕망이 개입되어 있는 듯하다. 다양할수록, 앞이 보이지 않을수록 이러한 습관적 사고로부터 벗어나서 작은 것부터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현명한 태도가 아닌가 한다. 1994, 1995년의 충무로 영화들 역시 다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배용균 / 1995)이 있나 하면 <영원한 제국>(박종원 / 1995),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 1995), <태백산맥>(임권택, 1994)등이 있으며, 다른 쪽에서는 <닥터 봉>(이광훈 / 1995), <테러리스트>(김영빈 / 1995), <구미호>(박헌수 / 1994) 등이 있다. 충무로 영화들에 대한 장르적 특징과 주제나 소재의 차원을 통한 구분처럼 독립 영화들을 구분할 수 있으나, 미적 표현 방식의 변화로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의미있는 성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동사 지향적 표현에서 형용 지향적 표현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실험 영화들이다. 한국에서 실험 영화가 만들어지고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동사 위주의 영화 뿐만 아니라 형용사 위주의 영화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험 영화에도 동사적 표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형용사의 역할이 더 큰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Wet Dream >(김윤태 등 / 1992)에 나오는 수많은 동사들, 예컨대 빛의 움직임, 흐르는 수돗물, 머리를 감다, 몽롱한 존재, 육감하는 육체의 어루만짐, 살의, 못박기와 못빼기의 반복 등은 동사적 역할보다는 존재와 욕망에 대한 가없는 집중과 연민 그리고 비약하는 시간들과 공간들에 대한 반추, 살의와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 등 형용사적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서사보다는 이미지, 시점 주체의 확인과 투명성보다는 무작위 시점과 복잡다단한 심리 등이 두드러진다. 이는 <다우징>(김윤태 / 1996)에서도 다시 이어진다.
< Org >(임창재 / 1994)는 자살에 관한 이미지이다. 동사로서 이해되는 면도칼, 흘러넘치는 물 등은 사실 자살을 겨냥하고 있다. 반복과 변주를 통하여 이미지의 집중 효과를 노리는 이 영화는 < Over Me >(임창재 / 1996)에서 한층 심화된다. 전작보다 모노톤이 주는 대비 효과가 훨씬 강한 반면 이미지의 체계적 강화가 이루어진다.
< Org >에서 이미지를 엮어가는 것은 단순한 변주적 반복임에 비해 여기에서는 나부끼는 깃발이 영화의 앞뒤를 열고 닫으며, 시간의 경과는 사건의 경과를 따라 조절된다. 느낄 수 없는 선풍기의 바람과 전화기, 흔들리는 여자의 부유, 그러나 안정된 시간이다. 이후 분노한 나방을 마구 날아다니고 기차길 위로 걸어가는 어떤 존재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혼돈의 시간이 지나자 노골적인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 기차길을 달리는 남자를 향한 누군가의 시선 그리고 국화 한 송이, 환상 또는 고통의 기억들이 피와 시위 등의 형태로 몽타주된다. 이제 이름모를 주체는 자기 눈 앞에 놓인 이미지를 해독해나간다. 그러나 여전히 불투명하다. 남녀는 만나지만 의자는 비어있고, 창들은 불탄다. 그리고 깃발이 나부낀다. 서사는 닫히면서 그 강렬했던 동사들은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형용사로서만 남는다. 이 혼란스러움을 언어로 정박시키겠다는 용기 대신에 보다 숙련된 영화 언어의 형용사를 개발하는 숙제를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 남긴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형용사는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대사 언어와 동작 언어로 전달하는 것에 대해 보충하거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이미지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대사 언어와 동작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자로는 <나쁜 시절>의 도로, 부두, 지나가는 자동차가 등장하는 장면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또 <그랜드 파더>(김용균 / 1995)의 클로즈업된 탈중심화면, 서사의 비약을 메꾸는 움켜쥔 손, 파를 쓰는 칼질, 실루엣 등이 그러하다.
<표류>(유상곤 / 1996)도 전자의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낭만적이도록 푸른 바다와 구조를 기다리는 청년 그리고 떠내려온 실신한 노인에 대한 외면이라는 설정 외에는 사실상 처음과 끝을 이루는 서사가 생략되어 있다. 이유있는 생략인만큼 여러 각도에서 잡은 이미지 쇼트들이 강렬한 힘을 발휘하지만 동작 언어 또한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편이다.
후자로는 <어머니>(문승욱 / 1994)라는, 서사가 분명하지만 그 순간 순간의 쇼트들을 치밀한 이미지로 그려내거나, <말에게 물어보렴>(전수일 / 1995)에서처럼 분명한 서사보다는 오히려 이미지의 연상 작용으로 서사를 역으로 구축하는 경향도 있다. 그 외에도 <광대들의 꿈>(송일곤 / 1995)은 조형미를 통한 영상 언어의 구축이라는 시도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들, 즉 영화 이미지와 편집 그리고 사운드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표현력의 향상은 분명한 진전이다. 충무로 영화의 화려한 풍경과 매끈한 기술적 완성도는 독립 영화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외국의 상업 영화들과 비교해야 되겠지만, 충무로 영화에도 기술력의 향상을 기반으로 한 기술적 진보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고, 제작 조건만 주어진다면 독립영화에서도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충무로 영화가 장르적 영화의 단순 버전 업과 서사 스타일의 부분적인 변화에 그치고 있었던 반면에 독립 영화가 이미지 언어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노력을 보였다는 점은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재론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실험 영화들이 1920년대부터 시작한 유럽의 그것들과 어떤 변별성을 가지며 - 유럽의 실험 영화들이 서사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을 다시 반복할만한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었는지 - 또 1960년대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영화가 추구했던 지배 영화에 대한 경멸과 도전, 예컨대 <스콜피오 라이징>(케네스 앵거 / 1963), 심지어 <오후의 올가미>(마야 데렌 / 1943) 등을 작품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화 이념의 차원에서 뛰어넘으려 했는가에 대해 되집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실험 영화 작가가 이데올로그가 되어야 한다는 맥락이 아니라, 실험 영화는 자신 고유의 이데올로기를 발판으로 나왔다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 동사보다 형용사를 즐겨 사용한 드라마들에서도 문제는 있다. 이 시기 특히 청년 영화인들을 감동시켰던 타르코프스키의 흔적을 제대로 극복하거나 수용하는 문제가 그 첫번째이다. 두번째로는 서사적 완결성에 대한 부족함이 이미지에 대한 과대 신뢰로 드러나지 않았는가라는 점이다. 그래서 문학적 감수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세계를 보는 눈과 결단하는 태도 역시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 권력을 향하여
1982년 서울영화집단이 창단된 이후 1984년 영화 마당 우리가 만들어지면서 영화 청년들의 둥지는 마련되었다. 이후 각 대학의 영화 동아리들이 연이어 탄생하였고, 이를 통하여 많은 예비 영화 인력들의 불확실하지만 끈끈한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1986년 8밀리 영화 <파랑새> 사건 이후 영화 운동권에서는 제각각의 보다 깊은 실천적 방향 모색이 이루어지고, 1988년 민족영화연구소와 장산곶매의 결성, 1989년 바리터와 노동자 뉴스제작단의 결성, 1990년 독립영화협의회 창립으로 이어지면서 독립영화계는 다양한 형태의 자기 논리와 방향을 정립해 나간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각 집단들의 역량이나 이후의 활동 반경과는 별개로 <파업전야>(장산곶매 / 1990)로 일단락 매듭을 짓는다. 그 매듭은 <파업전야>라는 영화가 스스로 발동한 힘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시대 상황이 강제한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이후 지금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여러 개인과 단체들은 방향타는 불확실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신진 세력 또는 말썽꾸러기로 등장한다. 이 동안에 크고 작은 진지한 독립 영화 관련 영화제들과 행사들이 상업적인 극장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은 결국 1994년 거대 그룹 삼성 그룹이 영화계로 진출하면서 엮은 삼성단편영화제(1994)로 망라된다.
물론 모든 것이 망라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영화제 덕분에 그 전부터 있어왔던 다른 단편 영화제도 덩달아 부각된다. 이제 독립 영화 또는 단편 영화는 영화 청년들의 시대적 명제로 부상하였다. 그러한 힘이 모여서 한국독립영화협회(1998)가 탄생된다.
이 상황을 두루 넓게 본다면, <파업전야>까지의 독립 영화는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었고, 이후 삼성단편영화제 직전까지는 저항의 대상이 불명확해진 가운데 어떤 영화적 권력을 향하여 각개약진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다양한 스펙트럼은 삼성단편영화제에 의해 권력화된다. 이 행사는 삼성 측에도 권력을 가져다주었지만 단편 영화를 하는 청년들에게도 권력 근처에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고, 수상자들에게는 더욱 그런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불투명했다. 물론 자신 만의 노선으로 명확한 활동을 하는 집단들도 있었지만 일부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독립 영화인들에게 '영화 제작'이라는 짝사랑 대상은 버거운 존재였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유혹적인가, 또 권력의 찌거기로서 주어지는 명예는 얼마나 자기 위안적인가?
이런 맥락에서 [인디 포럼 '96]은 삼성이 가진 권력에 대해 그것을 공유하자고 제안하거나 또는 권력 주체를 분명히 하려는 시위였다고 보고 싶다. 독립 영화계가 사회적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완장을 찼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객과 지속적으로 만나기 위한, 정당한 방어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경쟁적이며 배타적인 또다른 권력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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