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2001) ★★★

듀나의 영화낙서판

나비 (2001) ★★★ :::

Djuna | 2001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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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무대는 21세기 초의 한국 어느 도시입니다. 잊고 싶어하는 기억만 지워준다는 편리한 망각의 바이러스가 떠돈다는 소문을 듣고 관광객들이 몰려오지요. 이중에는 낙태한 아이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안나라는 독일 이민도 섞여 있습니다. 안나와 가이드 유키, 택시 운전사 K는 함께 도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는 바이러스를 쫓아다니며 서로의 삶에 서서히 얽혀 들어갑니다.

아이디어의 독창성을 우선적으로 따지기 마련인 SF 장르에 속해있는 작품이니만큼, [나비]는 몇 점 깎인 채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을 지워주는 바이러스를 사람들이 쫓아다닌다는 설정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그리고 원작인 스트루카츠키 형제의 [노변의 피크닉])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빌려오고 있으니까요. 기억과 자아에 대한 묵상도 이미 이 장르에서는 지겨울 정도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르물이라고 해서 늘 장르적 기준을 통해서만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1세기 동안 SF도 어느 정도 무르익은 장르가 되었으니, 독창성에만 목을 맬 이유도 없고요. 중요한 것은 그 아이디어를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어떻게 내느냐겠지요.

[나비]는 독창성보다는 심각함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영화가 하려는 건 기억 (또는 기억의 부재)의 진창 속을 뒹구는 세 주인공들의 여정에 관객들을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거창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영화도 새로운 답을 내놓지는 못하지만 (특히 결말은 거의 교훈적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뿌연 화면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는 2시간은 상당히 강렬합니다.

[나비]의 세계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나비]의 미래 세계는 어떻게하면 저예산으로 미래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감독이 숙제를 꽤 열심히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프트 SF'의 자유를 마음껏 이용한 초현실적인 산성비가 내리는 도시나 나비, 납중독자들과 같은 소재들도 잘 쓰였고요.

디지털 카메라가 잡아낸 흔들리는 뿌연 화면 역시 관객들을 세 사람의 모험에 끌어들이는 효율적인 수단입니다. 이런 스타일이 부여하는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은근히 초현실적인 느낌이 스토리와 배경에 완벽하게 어울리기도 하고요.

세 명의 배우들 역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연기는 종종 거칠어지기도 하지만, 그건 짧은 스케줄의 강행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긴 그런 거칠거칠한 스타일과 매끈매끈한 연기가 아주 어울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비]에서 제가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각본입니다. 대충 두 가지를 잡아낼 수 있을 듯 하군요.

첫번째는 구성입니다. [나비]는 반쯤 꿈꾸는 듯한 분위기의 작품이므로 꼭 치밀하고 논리적인 구성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 주인공을 묶어줄 구심점과 나름대로의 심적 논리는 필요해요. 바이러스와 나비의 추적이 그런 구심점을 제공해줄 수는 있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걸 반쯤 포기해 버린 것 같습니다. 안나의 여정을 이끄는 것은 목적 의식이나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투어 서비스의 터무니 없는 비능률성이지요. 설상가상으로 안나는 그런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안나의 행동 동기는 시퀀스 단위로 뚝뚝 끊어져 있어서 연결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유키나 K도 마찬가지고요. 전체적으로 '인간 소통'이라는 주제에 스토리와 구성이 끌려간 흔적이 강해요.

두번째는 대사입니다. SF는 상당히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는 장르입니다. 자연스러운 대사와 추상적인 주제의 결합이 필수적인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이 영화의 각본은 영어나 폴랜드어 버전이 훨씬 자연스러울 겁니다. 결국 우리 언어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해야겠죠. 배우나 작가 모두 조금씩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결점은 많지만, [나비]는 여전히 아름답고 강렬한 영화입니다. 우리 영화의 스펙트럼을 한층 더 넓혀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장르에 대한 보다 치밀한 접근이 따랐다면 훨씬 좋은 영화가 나왔을텐데 말입니다.

기타등등

1. 관광 한국 홍보 영화는 절대로 아닙니다. 불친절한 여행사, 폭력적인 경찰, 험악한 도시 분위기, 엄청난 환경 오염,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영화를 통해 접했던 택시운전사들 중 가장 프로 정신이 떨어지는 운전사. 마땅히 후반부에 감정 이입을 해야 할 K라는 캐릭터에 제가 몰입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손님으로서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였어요.

2. 유키와 안나의 관계는 [페르소나]를 연상시키더군요. 직접적인 인용으로 보이는 장면도 있습니다. 특히 유키의 옆얼굴에 안나의 얼굴이 겹치는 부분 같은 것들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