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2001) ★★★☆
글: Djuna
2001년 08월 09일
1.
[소름]의 무대는 재개발을 코앞에 둔 낡아빠진 아파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그 아파트입니다. 분위기 한 번 굉장하죠. 영화 찍기 전에 특별히 손질한 것도 없다고 하는데, 미금 아파트는 영화 전체를 통해 음산한 귀기를 뿜어대고 있습니다.
정말 귀기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건물의 음산함은 스탭들이 뿜어대는 드라이아이스나 조명으로 빚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조금씩 남긴 수많은 감정의 흔적들이 건물에 남아 있는 거예요. 분위기만 따진다면 미금 아파트는 벨라스코 하우스나 힐 하우스와 같은 고전적인 귀신들린 집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라는 이유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리펄션]을 더 연상시키지만요.
스토리 역시 아파트 귀신 이야기 풍입니다. 귀신 들렸다는 소문이 있는 504호에 용현(김명민)이라는 택시 운전사가 이사옵니다. 용현은 504호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이작가(기주봉)와 아는 사이가 되고 옆집의 매맞는 아내인 선영(장진영)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들의 관계는 선영의 남편이 죽고 그 시체를 용현이 처리해주면서 발전됩니다. 약간 폭력적인 요소가 섞인 평범한 이야기로 흐르는 듯하던 영화는 용현과 선영이 모두 30년전 504호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에 얽혀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2.
[소름]은 자신을 장르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 공포 영화입니다. 장르 관객들의 입맛에 맞기엔 지나치게 아트 하우스 위주이기도 하고요. 윤종찬 감독은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자신의 단편 [메멘토]의 단점이 지나치게 현학적이라고 여기고 그걸 수정하려 했다고 했는데... 글쎄요...
그러나 좋은 아트 하우스 공포 영화가 하나 나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꽤 좋은 일이죠. 지금까지 우리 관객들은 공포 영화라는 장르를 지나치게 좁게 봐왔으니까요.
전체적으로 이런 아트 하우스 느낌은 영화에 몇몇 장점을 부여합니다. 우선 영화는 조바심치는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서두르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영화는 관객들이 미금 아파트의 분위기와 두 주인공들의 캐릭터에 몰두할 수 있도록 느릿느릿하고 한가하게 움직입니다. 영화는 의식적인 자극이나 권선징악적 결말을 피하고 있는데, 그 역시 천천히 불쾌한 느낌을 스며들게 하려는 의도와 맞습니다. 결코 한 방 먹이는 영화는 아니지만 공포 영화가 늘 그러라는 법은 없죠.
3.
 |
| 용현과 선영 |
자,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만약 이 영화가 철저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어처구니 없는 우연의 연속 때문에 터무니 없이 멜로드라마틱해질 겁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완벽한 유령의 복수담으로 만든다면 역시 진부하기 짝이 없고 믿음직하지도 못한 이야기가 될 거고요.
하지만 경계선 위에 서서 해석을 유보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관객들의 상상력이 은근슬쩍 초자연적인 해결책을 찾는 동안, 일련의 우연은 억지스러움을 잃습니다. 인과가 충분히 설명된 것도 아니니 일어난 사건들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우연이 아닐 수도 있고요, 그러는 동안 이야기의 바탕인 사실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애매함이란 공포물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공포심의 대부분은 불확실성에서 오거든요.
유감스럽게도 영화는 이런 설정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무대가 되는 504호에 대한 소설을 쓰는 이작가가 특히 그래요. 이작가와 광태 같은 캐릭터는 대폭 줄이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현실성도 떨어지고 (이 나라에서 장르 소설을 써서 한 몫 잡으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니!) '무지한' 관객들을 위해 자상한 설명을 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너무 분명해요. 이게 '현학성'을 줄이려는 시도였다면 실패라고밖에 할 수 없군요.
4.
[소름]은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가족 비극입니다. 선대의 죄가 끝도 없이 자식들에게 내려가고 그 결과 영문도 모르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근친 살인과 근친 상간으로 범벅이가 된 끔찍한 함정으로 빠져들죠.
그러나 관객들이나 비평가들은 이걸 조금 넓게 보고 싶어할 겁니다.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공간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되지요. 삼풍 참사로 아내를 잃었다는 감독의 개인 사생활을 알게 되면 그게 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지고요. 그 결과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붕괴되어 가는 건물을 우리나라, 또는 지난 30년간의 한국 현대사쯤으로 확장해서 해석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은유라기보다는 이런 곳에서 30여년 동안 썩어간 남자의 분노와 증오 쪽에 더 가깝지만요.
5.
[소름]의 스타일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절하며 어디까지가 충분한지도 알고 있습니다. 과장된 비극을 그리면서도 어느 정도 대상에서 거리를 유지할 줄 아는 냉정함이 있고, 비교적 사실적인 캐릭터와 배경 속에서 초현실적인 공포를 밀어넣는 테크닉 역시 능숙합니다. 용현과 선영을 연기한 김명민과 장진영 역시 무리 없는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요. 종종 각본이 각각의 스토리 사이에서 헤매는 듯 하기도 하고 야심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걸 커버할만한 장점이 더 많습니다.
올해 여름에 나온 한국 공포 영화는 [소름] 하나뿐이지만, 전체적 성과는 80년대 슬래셔 영화 클론들로 북적거리던 작년에 비해 훨씬 좋습니다. 유감스러운 건 이 영화가 아까도 말했듯 '아트 하우스' 취향이라, 좋은 장르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들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거죠.
(in courtesy of http://www.djuna.org)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