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 - 여우계단 ★★☆
글: Djuna
2003년 07월 30일
(스포일러가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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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좋은 영화였지만 시리즈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목한 건 그 작품과 오리지널 [여고괴담] 사이의 차이점이었습니다. 일제 시대의 잔재인 낡은 건물 속에서 동화 속의 계모들 같은 사악한 선생들이 죽은 학생의 유령에게 가차없이 살해당하는 [여고괴담]과 화사한 미로와도 같은 학교를 배경으로 초여름날의 열병처럼 몽환적이고 서글픈 로맨스를 그려보였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극과 극을 달리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지요. 와, 같은 제목과 여자 고등학교라는 배경만 주고 공포 영화를 만들라고 하니까 원작과 전혀 다르면서도 원작을 능가하는 영화들이 나올 수 있구나. 잘만 하면 이 시리즈도 [에이리언] 시리즈처럼 감독들이 자기 개성을 과시하는 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파프리카 하지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흥행 성적은 그저 그랬지요. 3편이 나오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했던 것도 2편의 어정쩡한 흥행 결과 때문이겠지요? [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 - 여우계단]도 1편으로 복귀하려는 시도처럼 보여요.
듀나 네, 저도 스틸이나 예고편을 보면서 각오를 했습니다. 이해도 했고요. 하지만 제작과정을 보면서 실망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와는 달리 [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 - 여우계단]에는 자체의 분명한 개성이 없어 보였으니까요.
파프리카 줄거리 이야기하기 싫어 진저리를 치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제가 간단히 이 영화의 내용을 요약해보기로 하겠어요. 이 영화의 배경은 모 예술여고입니다. 발레리나 지망생인 진성과 소희는 단짝 친구입니다. 소희는 진성을 사랑하지만 진성은 자기가 결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소희에 대한 질시를 마음 속에 감추고 있지요. 그러는 동안 뚱뚱한 몸집 때문에 늘 따돌림을 받는 미술과 학생인 혜주는 몰래 소희를 좋아하고요. 영화는 이 세 명의 주인공들이 학교 기숙사 앞에 있는 전설의 여우계단에서 소원을 빌면서 전개됩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 여우계단의 소원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남기지요.
듀나 [여우계단]에서 가장 차별화되는 건 배경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일반 고등학교가 아니라 예술 고등학교昑니다. 차별성만 따진다면 좋은 설정이었어요. 예술 고등학교 아이들은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다른 종류의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파면 좋은 소재가 나올 가능성이 크지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여우계단'과 소원이라는 설정도 좋았답니다. 소원은 한국 학교 도시 전설의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니까요. 특히 세 주인공의 절실한 소원이 에셔의 계단처럼 빙빙 돌면서 죽음의 윤무가 되는 설정은 괜찮았어요. 이것도 계단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걸까요?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까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아요.
파프리카 일단 별로 무섭지가 않아요. 심지어 공포영화 장르 공식을 마지못해 끌고 온 로맨스였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정도의 자극도 없더란 말이에요. 1편처럼 적극적인 공포 영화가 되려고 했던 영화인데도요. 영화 안에 무서운 장치 많잖아요. 뱅뱅 귀신, 사다코 귀신, 마리오넷 귀신, 미치광이 살인마... 그런데 왜 안 무서운 거예요?
듀나 재료만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으니까요. 특히 공포영화가 그렇죠. 늘 하는 말이지만 이 장르에서 중요한 건 리듬이에요. 공포 효과를 내는 자극은 그냥 존재해서는 안돼요. 적절한 효과를 내는 결정적인 순간에 놓여야 하지요. 물론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건 자극 자체가 아니라 자극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배려가 거의 안되어 있었어요. 자극들은 그냥 던져질 뿐이에요. [장화, 홍련]처럼 이 테크닉에 능숙한 영화를 본 뒤라 더욱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공포영화적 요소가 아니에요. 그 기반이 되는 드라마지요.
일단 아이디어는 괜찮아요. 혜주는 소희를 좋아하고 소희는 진성을 좋아하고 진성은 소희를 넘어서길 바라다 소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혜주는 소희를 다시 불러오고... 괜찮은 공포 영화의 삼각 관계지요.
하지만 정작 영화는 삼각 관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요. 제 생각에 그건 인물 배치와 설정의 문제 같아요.
우선 유령의 문제가 있어요. 앞의 두 편에 나오는 유령들은 모두 설득력있는 존재들이었어요. 진주는 '우정'에 대한 갈망과 선생들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있는 고전적인 유령이었죠. 효신은 현재의 흐름 속에 앙금을 남긴 과거와 학생들의 집단 히스테리가 결합된 현상이었고요. 하지만...
파프리카 이 영화의 소희도 설정은 그럴싸하지 않나요? 하나. 소희에겐 진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동기가 있어요. 둘. 이 영화는 소희의 존재를 꼭 유령으로 규정하지 않죠. 영화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모두 보다 평범한 해석이 가능해요. '소원 성취'는 모두 현실적인 원인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진성은 죄의식 때문에 환상에 시달렸고 혜주는 소희가 죽은 뒤로 머리 속의 뭔가가 탁 하고 끊긴 거지요. 영화는 종종 이 모든 게 실제가 아니라는 암시를 풍깁니다. 혜주는 여우계단이 소원을 들어주어 살을 뺐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약을 먹고 있었고 혜주에게 들린 소희의 유령은 종종 진성과 소희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소문밖에 모르는 것 같지요. 심지어 영화는 여우계단이 갑자기 29개가 되는 현상도 나름대로 설명하려 하고 있어요. 전 설정엔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듀나 기본 설정엔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다루는 방식은 문제가 있죠. 우선 소희는 공포 영화의 유령으로서 심각한 결점이 있어요. 도대체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거죠. 소희는 진성을 사랑하고 그 감정이 꽤 깊은 것 같지만 그게 굉장한 집착으로 느껴지지는 않아요. 그러기엔 캐릭터가 너무 밝고 동글동글하거든요. 아무리 뱅뱅 귀신, 사다코 귀신, 마리오넷 귀신으로 변장해도 설득력이 없단 말이에요. 물론 우린 이 모든 게 진성과 혜주의 상상이라고 믿을 수 있지만 그래도 뭔가 모자라요. 여기선 일단 관객들이 피부로 느껴야 하니까 말이에요.
소희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는 의무는 살아남은 두 사람들이 지고 있어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들은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간 진성과 그런 소희를 다시 불러온 혜주지요. 하지만 둘 다 충분한 감정폭을 살리고 있지 못해요. 진성이 소희에게 품고 있을 복잡한 감정들은 툭하면 튀어나오는 공포 효과에 막혀버립니다. 결말의 화해와 용서 역시 약하고요. 혜주는 지나치게 캐리커처화되어서 이 캐릭터가 품고 있는 (또는 품고 있어야 하는) 강렬한 감정이 무시되고 있으며 이 캐릭터의 마지막 선택도 충분한 극적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전체 이야기가 약해지지요.
'여고괴담'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작품에 장애가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급했죠. [여우계단]에서는 그게 더 심해진 듯 해요. 이 영화는 공포영화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더 좋아졌을 작품이었어요.
파프리카 전 학교 묘사의 빈약함을 단점으로 들고 싶어요. 전에 나온 두 편에서 학교는 분명한 권력 구조가 존재하고 집단과 집단 구성원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었어요. 하지만 이번 영화의 무대인 예술 고등학교는 그냥 막연하기만 하군요. 이름이 붙은 주연들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그냥 군집동물처럼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하고 선생들은 [피너츠]의 어른들처럼 거의 보이지 않아요. 꼭 이들이 일정한 비중으로 등장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기왕 새로운 배경을 잡았다면 피상적인 동기와 설정만 제공해주고 만족하는 대신 보다 이 세계를 깊이 팠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듀나 독특한 무대를 제공했으면서도 시각적인 차별성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지요. 이 영화는 그냥 1편의 뿌리로 돌아간 것 같았으니 말이에요.
파프리카 아, 전 사실성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서스피리아]식 화사함을 적극적으로 추구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 중이랍니다.
듀나 배우들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일단 전 이 시리즈의 배우들에게 굉장히 전문적인 연기를 기대하지는 않아요. 가장 중요한 건 가능성이죠. 그런 면에서 세 배우들은 그럭저럭 문제없이 영화 속에 녹아들었던 것 같아요. 조안(A)의 연기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어 보이는 건 배우보다는 감독의 선택이었던 듯 하고 둘 다 의도적이었겠겠지요. 박한별의 동글동글한 얼굴은 우리나라 연예계에 지나칠 정도로 흔하지만 그게 배우 탓은 아니고요. 송지효도 중간에 뭔가 빠진 것 같은 캐릭터를 고려해보면 괜찮았어요.
하지만 캐스팅은 여전히 거슬려요. 아뇨, 개별 배우들의 연기나 외모에는 큰 불만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이미지의 차별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전체적인 인상이 밍밍하군요. 미적 감각이 부족한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의 방벽에 붙은 핀업 사진들 같다고 할까.
파프리카 슬슬 정리를 해볼까요...
듀나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이전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자극이나 카타르시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답니다. 영화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들도 성공한 부분들보다 예술적 실수들이었고요. 제가 이 시리즈에 대해 품고 있는 불공평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에 대해서는 큰 점수를 줄 수 없을 것 같군요.
기타등등
아, 사다코 귀신은 아무리 맘을 열고 봐도 표절한 티가 너무 노골적이더군요. 만드는 사람들도 이런 장면의 부작용이 어떤지 잘 알았을텐데.
감독
윤재연
주연
송지효....윤진성
박한별....김소희
조안....엄혜주
박지연....한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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