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에 비친 세기말의 단상 :::

여임동 | 2000년 01월 05일 조회 3859
세기말이다. 사람들은 혼란과 허무에 둘러싸여 사랑과 죽음에 있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듯 보인다. 중용이나 절제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닌 듯 죽음도 사랑도 하드고어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솔직하고 화끈하게... 그러나 그 이면엔 끝간데 없는 허무주의가 만연하다. 자, 백년단위도 아닌 천년단위가 바뀌는 이 시점... 이 혼란스럽고 무정부주의적인 세기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가?
세기말이란 단어는 한 세기의 끝이라는 사전적 의미 외에도 사회적인 배경을 지니고 탄생했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 절망적 퇴폐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19세기 말경... 사회의 몰락으로 사상이 부패하고 도덕과 질서 등이 퇴폐와 혼란에 빠진 이때 '데카당스'사조가 만연했다..
세기말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을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도구로 20세기의 획기적 발명품이자 문화코드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던 영화를 이용하는게 좋겠다. 얼마전 문화적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거짓말' 이 적당할 듯 하다.
마침 1900년대의 마지막 해에 영화에서 성문제가 불거진 것은 우리나라만은 아니다. 근친상간적 성격이 짙은 정사장면을 실연한 프랑스의 폴라엑스, 혼교파티를 재현한 미국의 아이즈 와이드 셧 등이 각자 다른 성감대를 건드리며 정형화된 성윤리 의식에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이들 영화는 섹스를 파격적으로 다룬 점에서 파격적인 동시에 성과 인간의 문제를 심도있게 파헤친 점에서 문제작이기도 하다. 세기말 영화가 표현하는 섹스는 어떤 것인가. 영상속의 섹스는 사람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고 대리충족시켜주는 것인가?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인간적인 욕구인 성! '세기말의 성'이 보여주는 인간의 욕망, 그 속에 숨겨진 세기말적 단상을 살펴보려 한다.
'거짓말'은 알려진 대로 18세 여고생 Y와 아내가 있는 38세의 조각가 J의 성적 탐닉을 다룬다. 제이와 와이가 보여주는 관계는 '파격적'이다. 포르노그라피에서나 볼 수 있는 여러차례의 변태적 행위와 사디즘. 마조히즘적 관계는 보는 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장선우 감독의 표현대로"성적으로 억압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집단적인 저항 심리 혹은 방어 기제가 아닌가 싶다.
영화속에서 제이와 와이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원조교제에다 불륜이다. 그들은 가학 피학적 섹스를 비롯한 엽기적 행위를 저항없이 치루어낸다. 와이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깝고 제이는 간접적으로 오빠를 죽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에 대한 설정은 에로티시즘을 위한 장치라기보다 세기말적 증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섹스는 더 이상 아름다움이나 관능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금기를 깨는 폭력이자 저항이고 풍자이다. 상상을 초월한 대담하고 변태적인 섹스와 반문명적 행위가 자아정체성 탐구 인간본성으로의 회귀란 이름아래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우연히 만나 다양한 방법의 섹스를 즐기며 사랑을 나누고 행복해하다가 허무한 결별을 한다. 실제적인 줄거린 사실 이것이 전부이다. 다만 다양한 방법의 섹스란게 문제가 되는 것인데... 몽둥이로 매질을 하며 쾌락을 느끼는 사도 마조히즘이 가장 두드러진다. 처음엔 몽둥이로 시작해 회초리, 밀대자루 등을 거쳐 곡괭이자루까지 등장한다. 공륜위는 이러한 설정을 심각한 변태적 행위로 판단하여 등급보류판정을 내렸지만 베를린영화제의 관객들이 그랬듯 자신도 모를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장면일 뿐이다. 심리를 지배하고 모욕을 동반하는 전형적인 사도-마조히즘과 거리가 있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사씬에서 그들의 몸은 결코 에로틱하지 않다. 깡마르고 볼품없는 두 남녀의 적나라한 섹스씬은 바람난 유부녀의 에피소드를 그린 <@@부인>시리즈 만큼의 환타지도 형성하지 못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거친 화면과 제3자의 해설 그리고 연기자들의 자기 고백적 인터뷰 또한 관객의 에로티시즘 형성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관객과 영화간의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사회의 성담론에 대해 반추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 육체의 노출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솔직한 것이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성적 자극이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 작품은, 관음증을 부추기거나 비현실적 성욕해소를 위한 포르노 그라피로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신분과 역할에 의해 비롯되는 장애는 그들 사이에 없다. 사랑의 방법이나 절차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없다. 와이는 제이를 사랑하므로 제이의 매질을 견딘다. 제이는 와이가 자신을 위해 쾌락없는 고통을 견디고 있음을 깨닫고 역할을 바꾼다. 이들은 철저히 동등한 입장으로 시작하여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의 만족을 추구한다. 제이와 와이는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할 뿐 제3자의 눈은 중요치 않다. 서로를 존중하는 제이와 와이의 정사는 천진난만하기 까지 하다.
제이는 "일 안하고 살 수는 없나"라는 무정부주의적 발상을 지닌 애어른이다. 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와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한다. 이들의 관계는 얼핏 즐거워 보이지만 실은 지독하게 우울한 풍경을 자아낸다.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꿈의 허망함, 완벽히 자라지 못한 어설픈 어른행세가 쓸쓸하기만 하다.
'거짓말'은 거창한 메시지 전달이나 가치관의 전복을 노리고 제작된 작품이 아니다. 다만 불구자처럼, 비정상적 성행위를 통해서만이 절정에 도달할 수 있는 남녀의 '기이한 러브스토리'일 뿐.
또한 제이는 경제 성장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오다 IMF에 뒤통수를 맞은 우리 사회에 시비거는 인물이다. 그의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은 와이로 인해 충족된다. 그러나 5년동안 지속된 그들의 관계에 변화는 없다. 제이가 부인과 이혼하겠다고 하자 와이는 헤어지겠다고 한다. 그들은 순간의 쾌락을 즐기고 만족하다 어느날 각자의 길로 돌아간다. 전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이들의 태도는 자칫 말초적이고 육체적인 자극으로 비칠 수 있다. 윤리와 질서를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대량살상과 인간성 파괴를 생산한 20세기...어쩌면 제이와 와이는 근현대의 이데올로기였던 '합리적 이성'에 대해 냉소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 처럼 폭소를 자아낸다. 계속되는 정사씬은 지루하다 못해 허무했고 매질의 강도와 사랑의 정도가 비례하는 듯 때려달라고 울부짖는 제이가 애처롭기 까지 하다. 플롯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벌어지는 반복적인 성행위을 보고 있으면 "꼭 저런 방식이어야만 했나?"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들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관주인이나 지하철 속의 사람들의 시선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성적 억압을 대변한다. 때리는 행위의 주체가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고 남자의 가학행위가 아버지의 폭력에서 기인함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적 가부장제에 대한 조롱이다. 제이와 와이는 이러한 억압과 조롱에 아랑곳없이 서로에게 열중함으로써 억압과 상처를 극복하는 듯 하다.
세기말의 영화판에는 하드코어 섹스영화가 넘쳐난다. 이러한 영화들은 세기말에 범람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인간정체성의 혼란을 성으로써 표현한다. 이 영화에는 말초적 에로티시즘과 상관없이 금기의 파괴와 일탈의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금기파괴와 일탈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그래서 영화는 죽음과 연관된 성적 이미지를 재현한다. 이는 세기말의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가치를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오직 성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므로 외로워보인다. 결국 관음증을 포기한 영화는 체제 전복과 금기 파괴의 코드를 성에 포함시킴으로써 인간관계와 존재에 관한 성찰을 몸으로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기말, 영화는 소외된 인간들의 실존을 '성'을 통해 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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