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정> :::
이윤형 | 2002년 01월 20일
조회 12771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에 항상 술자리에선 외톨이가 된다. 그렇게 점점 취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콜라만 홀짝이며 멀쩡한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자면 가끔 내가 위대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기도 하고, 또 그러다 보면 가끔 나도 술을 약간 마시고 하수의 인간들이라 그 자리에서 쉽게 착각해버리곤 천재의 광기를 패러디하며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기도 한다.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을 보고 나의 이러한 창피한 모습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아주 잔인하게도 남자의 성적 욕망을 중간에 두고 남자와 여자. 인간이라는 존재들을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아주 비이성적이고 극히 감정적인 생각으로는 어차피 모든 인간들이 알고 있는 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다들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말을 한다면 어떤 부류는 창피하고 그걸 말한 부류는 유치해질 뿐이다.
데이빗 마멧 감독 작품 <윈슬로우 보이>의 마지막에 두 남녀가 "여자를 모르시는군요" "남자를 모르시는군요"라고 말하는 것에 전혀 동의할 수 없듯 나는 남자와 여자가 어떠한 다른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는 지 모르지만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 같고 (그 크기의 차이는 모르겠지만) 또한 너무나 많이 자위할 것들에 얽매여 허약한 웃음으로 담배를 피우는 여중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평론가 이효인씨가 '인간을 이해하는 9가지 방법'이라는 글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듯 인간이란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치졸하며 비이성적이라는 건 안다.
다들 안다. 다들 알까? 다들 알면 또 어때. . 감정적이라고 자처하며 저렇게 글을 쓰는 내게도 '응침'을 가하는 영화가 바로 <오! 수정>이다. 다들 알지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 내가 알면 다들 알거라 생각되지만 다들 알면 또 어떤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다들 알 수 없고 또 알 필요도 없는 영화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것을 비판하지 않는데. . 적어도 <오! 수정>은 웃긴다. 다른 걸 다 제쳐두고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한 번 웃으며 뒤돌아 씁쓸한 표정 한 번 지을 수 있는 꽤나 기분 나쁘면서도 충분히 웃기는 영화다. 인간의 치졸함은 충분히 좋은 웃음의 소재인 것이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를 만나기 위해 별로 친하지도 않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만나 적이 있는데 '술집'에서 '윤락가' 가는 얘기라니. . 정말 최악이었다. 술도 안 마시고 윤락가도 안가는 나는 3시간 동안이나 아무 말도 안하고 뮤직 비디오가 나오는 모니터만 봤다. 세시간이 지나도록 이 발정 난 개 같은 인간들은 그 얘기만 했다. 지금 가자느니. . 차를 어떻게 하자느니. . 돈을 모으자느니. . 어디가 좋다느니. . 3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먼저 집으로 가면서 난 확실히 안 것이 몇 가지 있었다.
1. 발정난 개는 술도, 안주도 안 먹는다.
2. 발정난 개는 '사전 단계'에 관해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3. 발정난 개는 명확한 하나의 주제 외의 다른 것은 금방 잊어버린다.
4. 발정난 개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짓 하는 건 꺼린다.
 재훈 (정보석 분)은 수정이라는 여자만 생각하는 발정 난 개다. 그녀랑 한 번 자보는 게 이 영화에 나오는 그의 가장 큰 바람이다. 그리고 이 개는 아주 치졸하다. 어눌해 보이지만 그 어눌함 속에 인간이 갖고 있는 나약함과 사악함을 모두 갖고 있다.
수정 (이은주 분)은 재훈을 안달 나게 한다. 그녀는 재훈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저, 처음이예요"라고 할만큼 청순한 여자이지만 사실 '선수'다. 돈 많은 재훈을 꼬시기 위해 살짝 살짝 거리를 두는 진짜 선수다.
이 영화는 재훈을 바라보며 한 번. 수정을 바라보며 한 번 진행된다. 같은 일들을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풀어나가는 독특한 듯 하면서도 스릴러 장르에서는 꽤나 오랫동안 쓰여왔던 수법이다. 그저 <오! 수정>에서 쓰인 이 방식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거나 공포를 준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란 존재를 응시하는 방식이란 점이 재미있을 뿐이다. 두 상황, 하나의 이야기에서 홍상수 감독은 전지 전능한 신과 같다. 그들을 천천히 비웃으면서도 언급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차갑게 응시했다. 위에서도 말했듯 이러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누군가 말한다면 어떤 부류는 창피해지고 그걸 말한 부류는 유치해질 뿐이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유치해지는 걸 창피하지 않게 여기는 걸까. . 혹은 그게 유치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내게 '영화사' 수업을 가르쳤던 교수에게 난 "홍상수 감독은 언제, 어떠한 상황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자기가 빠진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인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를 모르는 것 같다."라고 말했었다. (확실한 문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걸 모른다는 말은 확실했다) 사실, 저런 말은 그냥 내 마음 속 깊이 생각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건데 여균동, 장선우, 홍상수 감독 얘기를 하다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인 여균동 감독을 칭찬하기 위해 깎아 내렸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가 지금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아는 감독인 것 같다. 그는 계속해서 영화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걸 알아가고 또 그런 과정을 훈련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계속 그의 습작을 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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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형
전 '리버스' 편집기자. 현 '씨네라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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