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투리브(Le Temps qui reste, '05)

영화보다 대굴대굴

타임투리브(Le Temps qui reste, '05) :::

다우면서도 답지 않은

김승환 | 2006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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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에 따라 특유의 색채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어떤 감독의 영화는 주어진 스토리가 전해주는 메시지만을 강요하기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너무나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끔 하는 감독도 있습니다. 프랑소와 오종은 앞선 예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후자에 속한다고 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그는 비주류적인 시각을 적극적으로 앞세우고 사회가 표준이라 여기는 것들을 공격합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판단하기에 그의 손아귀에 걸린 대상들은 적어도 영화 내에서만큼은 가치중립적인 평가를 받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아무리 평범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괜스레 한두 번은 더 그의 속내를 의심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관객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게 있어서 오종은 분명 그런 감독입니다. 아주 엉큼하면서 의뭉스런 감독 말이에요.

'Time to Leave' 영문 제목 그대로 이 영화에는 죽음을 앞둔 한 젊은 남자가 나옵니다. 삶과의 결별이란 이유 때문에 영화는 사뭇 평이한 스토리를 선보여요. 그래서 '오종이 변했다'라는 말들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하던 얘기를 하는 중입니다. 로맹이란 남자 주인공은 오종 감독이 만들어낸 기존 캐릭터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거든요. 그는 성적 소수자로서 동성애자이며, 직업적 성공의 기회를 눈앞에 둔 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실패자인 동시에 사회의 표준인 가족에 회의적 시각을 지닌 아웃사이더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로맹은 주류 진입을 거부당한 존재입니다. 감독의 여전함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파악하는 관계는 변함없이 상대적입니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또는 양성애든 어느 한 쪽에 절대 선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취향과 관계는 상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거죠. 그러나 어느 곳, 어느 때나 사회가 제시하는 표준은 있기 마련인지라 그 표준 속으로 편입하려는 잠재적 욕망 또한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욕망이 벽에 부딪히거나 좌절되면서 욕망의 대상 또는 욕망의 주체를 파괴해버리는 것이 오종 영화의 한 특징인데, <타임투리브>에도 그 양상이 엿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 역시 틀림없이 '오종' 답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종의 변화를 바로 이쯤에서 언급해볼 필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오종 감독의 97년 작품인 <바다를 보라>에서 그는 주류에 대한 욕망을 지닌 여인으로 하여금 욕망의 대상을 깨어 부수도록 만듭니다. 관계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던 <크리미널러버>나 <워터드롭스온버닝락>에서도 그 욕망은 욕망의 주체를 기이하게 변형시키고 파멸에 이르게 해요. 욕망의 대상이든 주체든, 그 무엇이 파괴되는지에 상관없이 그 양상은 유괴, 살인, 감금 등 공격적이고 자극적이었죠. 그런데 <타임투리브>에 이르러서 감독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단절의 수단을 동원하지만 물리적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느낌이 예전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또한 소수자의 입장도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를 보라>에서 아이를 강탈한 여인은 살아있지만 더욱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에 반해 <타임투리브>의 로맹은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자신의 아이를 한 가정에 남김으로써 편안한 심리 상태를 갖게 되죠.

오종의 이와 같은 변화가 놀랍긴 하지만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예전 영화들에서 다수와 갈등을 빚는 소수는 언제나 불확실한 미래에 처한 상황에서 결말에 도달하곤 했습니다. 그 얘기는 거꾸로 말하면 다수는 끊임없이 위협받으면서도 두려울 정도로 견고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견고함에 대한 두려움이 오종의 공격적 성향을 완화시키고, 위태하나마 다수의 연명에 기여함으로써 소수의 욕망을 대리 만족시키기에 다다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는 어디까지나 오종의 영화를 지켜본 한 개인의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 추측에 따르면 바다에 나온 로맹이 어린 시절 자신과 화해하는 장면은 감독의 변화된 앞날을 예고하는 상징으로 작용하는 게 가능합니다. 어떻게 변할까요? 아니면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이 글을 한낱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까요? 기나긴 쓰레기를 만들어낸 쪽팔림에 머리 긁적이는 제 모습 쪽이 은근히 더 맘에 들지만 뭐, 일단은 기다려보는 수밖에요. 그 기다림의 동안은 무척이나 즐거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