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인생(2004)

영화보다 대굴대굴

하류인생(2004) :::

김승환 | 2004년 05월 21일
조회 6343

1. 1997년 <창>

<장군의 아들>, <태백산맥>, <서편제> 등을 이미 봤지만 영화를 서서히 즐기게 되면서 처음으로 접하게 된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창>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안목이 없었던 시절(솔직히 지금도 제 안목은 대단히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요), 이 영화는 3류 싸구려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자리를 놓고서 제 머릿속에서 심각한 다툼을 벌였었죠. 지금과는 달리 한 10여분 생각하다 결론 내리기를 포기했고 그 후로 다시 본 적도 없지만, 인터넷상의 어떤 영화 해설을 보니 이렇게 적혀있네요. '경제가 커지면서 점차로 파괴되어 온 성윤리와 결국 부끄러움도 없이 성을 팔고 즐기게까지 된 세태를 객관적으로 짚었다.'

2. 2002년 <취화선>

오원 장승업의 삶과 고뇌, 열정을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보여준 영화죠. 장승업의 삶이 무게를 더해가면서 우리나라의 역사 또한 서서히 흘러갔고, 그 역사 속에서 장승업은 사랑하고 갈등하고 살아갑니다.

구한말 우리나라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짚으면서 한 예술가의 열정과 고뇌를 그린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장승업의 모습에 임권택 감독의 모습이 교차되곤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굳이 저 뿐만은 아닐 거에요. 어쩌면 그 해 칸 영화제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구요.

3. 2004년 <하류인생>

임권택 감독이 우리 문화, 우리 역사 등 우리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취사선택한 우리 것들을 바탕으로 특정 인물, 특정 소재에 집중해서 영화를 전개시켜 나가는 게 제가 봐 왔던 임권택 감독의 보편적 작품들이었어요. 이 영화도 그 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70년대 유신 시절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아우르면서 태웅(조승우)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고 있거든요. 태웅이 주먹패라는 점에서 <장군의 아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역사의 현장 속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는 점에서 <취화선>을 연상시키기도 하죠.

하지만 태웅이란 인물에겐 김두한이나 장승업과 같은 묵직한 존재감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앞선 두 영화와는 사뭇 느낌이 다릅니다. 태웅은 영웅이나 우상도 아니고 예술 혼을 불사르고자 하는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잘 살아볼 수 있을까'를 고뇌하며 살아가는 우리 주변 인물이기에 그에게 엄청난 존재감을 기대한다는 건 애초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그 결여된 존재감으로 인해 영화의 구심점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탓에 <하류인생>은 구름에 떠다니는 듯한 인상을 주는군요.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세상사 속에서 태웅의 인생도 그저 흘러간다고나 할까요. 세상과 함께 그저 흘러가는 게 인생이라고 했죠 아마……. 하지만 전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연륜이 쌓인 것도 아니고 마음이 넉넉하지도 못합니다. 차라리 세상과 부딪혀서 깨지면 깨졌지…….

4. 세상 속에 사람을 담았나...

양과 질, 어느 한쪽에서 항상 상류와는 거리가 멀었던 태웅의 삶은 우리나라의 근대사 속에서 펼쳐집니다. 없이 살 때는 믿을 거 주먹뿐이므로 주먹패로 살았고, 돈이 있을 때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정권에 빌붙었죠. 그의 삶은 그렇게 시대와 함께 변해갑니다. 김두한이 시대에 저항했고 장승업이 시대를 초탈했다면 태웅은 시대에 파묻혔습니다. <취화선>이 세상을 사람 뒤에 따라 붙였다면 <하류인생>은 세상 속에 사람을 담은 꼴입니다.

그래서 감독의 작품 중에서 비슷한 쪽을 찾자면 <장군의 아들>이나 <취화선>보다는 <창>쪽이에요. '...세태를 객관적으로 짚었다.' <창>이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사창가의 모습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짚어냈듯이 <하류인생> 역시 그 시대의 세태를 짚어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의 구심점을 확고하게 해 주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점입니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건 아니건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 입에선 그것이 아홉수에 걸린 임권택 감독의 실수였다는 말이 오르내릴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