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첵(Paycheck, 2003)

영화보다 대굴대굴

페이첵(Paycheck, 2003) :::

김승환 | 2004년 01월 24일
조회 5512

1. 2004년 현재

2004년 1월 3일 미국의 화성 탐사로봇 스피릿이 화성에 도달했답니다. 23일 현재 문제가 발생한 듯하지만 그 전까진 사진을 비롯해 착실하게 조사 과정을 수행해 나갔다고 해요. 2003년에는 몇몇 유전자 지도가 만들어졌고 복제 동물도 등장했습니다. 어떤 단체에선 인간 복제를 연구 중이라고 해서 파문이 일기도 했었죠. 이처럼 인간의 기술은 인간과 닮은 로봇, 복제 인간의 실현 가능성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시간 여행이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기술에 대해선 공식적으로 언급된 바를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SF 영화에 등장할 법한 내용들 중에서 인간이 도달한 기술 수준은 공식적으론 앞에 언급한 정도라 할 수 있겠네요.

2. 가까운 미래

<페이첵>의 배경이 되는 미래는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는 가까운 미래에요. 사람들과 도시의 모습이 현재와 별 다를 게 없더군요. 버스나 지하철도 지금처럼 다니고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도 낯선 모습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은 분명 지금보다 뛰어납니다. 3차원 입체 모니터가 현실화되어 있고, 사람들의 기억을 부분적으로 선택해서 지울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복제 인간이나 로봇에 관한 언급은 아예 없지만 앞서 언급했던 기술 중 한 가지는 분명 등장합니다.

종합해 봤을 때 사람들의 기술력은 최첨단 분야에서 뛰어난 발전을 보였지만 아직까진 실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어오지 못한 상태에요. 다시 말해 2004년 현재로부터 그리 먼 미래가 아니란 의미겠죠.

3. 영화 <페이첵>

헐리웃에 진출한 오우삼은 <미션임파서블2>까진 비교적 자신의 과거 스타일을 유지했습니다. 느와르적인 감성은 많이 퇴색되었다 할지라도 액션이란 측면에선 분명 그랬었죠. 하지만 <윈드토커>에서 갑자기 전쟁 영화란 장르로 범위를 넓히더니 이번엔 SF 영화까지 손을 대는군요. 더구나 <페이첵>은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된 영화이기까지 합니다.

그럼 오우삼이 과거의 자신과 이제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는 걸까요? 글쎄.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우삼 답지 않은 영화란 얘기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곳곳에 엿보이는 오우삼 스타일 때문에 영화가 애매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액션 장면에서 보여주는 전혀 공학도들답지 않은 주인공들의 능력과 위기 상황을 술술 풀어나가는 그들의 능력을 볼 때, 마이클(벤 애플렉)과 레이첼(우마 서먼)은 오우삼 영화에 등장했었던 잘 훈련된 전문가들과 비슷합니다. 천재 공학자와 박사로 설정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과거 오우삼 영화의 주인공들이었던 킬러, 형사, 특수 요원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거죠. <페이첵>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원래는 어떤 식의 인물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우삼 식으로 변형된 듯한 그들은 영화의 설정과 가장 안 어울리는 인물들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그들이 펼치는 액션이 퍼즐을 맞춰가는 재미와 함께 이 영화의 주된 재미 중 하나에요. 병 주고 약 주고 혼자 다 하는 셈입니다. 결국 <페이첵>은 오우삼 스타일이 영화와 충돌하면서 양날의 검처럼 사용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다시 2004년 현재

사람을 망각의 동물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나를 이루게 했던 순간순간들은 개인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기 마련이에요. 그 순간들은 단순한 기억이나 추억이 아닌 한 개인을 있게 한 밑바탕이자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지운다는 것은 결국은 자신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 자신조차 존중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깁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선 사랑, 우정, 존경, 자애, 관용 등 모든 긍정적인 가치들이 속빈 강정으로 전락해버릴 거 같네요.

인간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도 중요하고 인류와 세상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모든 것은 자신에 대한 존중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서부터 출발할 지도 모릅니다. <페이첵>이란 영화에 의하면 그걸 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더욱 큰 걸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먼 미래가 아닌 아주 가까운 미래에 말이에요.

김승환
난 언제나 이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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