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대굴대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글: 김승환
2004년 02월 29일


1. 1997년...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건 아무래도 사람 사귀는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전 친구들 전화번호를 굳이 수첩이나 다른 곳에 적어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뻔하거든요. 그런 제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죠. 사귄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차마 그런 표현을 쓰기가 쑥스러울 정도였어요. 만나는 건 한 달에 한두 번쯤, 연락은 한 주에 한 번 정도 했을까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전 변하지 않았습니다. 혼자가 익숙했던 제겐 언제나 둘이여야 한다는 건 때론 엄청난 부담이기까지 했어요.


2. 1999년...

끊겼다 이어졌다 하던 그 만남은 결국 끊어져버렸습니다. 특별히 헤어지잔 말도, 잘 있으란 말도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썼듯이 사귄다는 표현 자체가 쑥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알았습니다. 그 때 제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걸. 보고 싶단 말이 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흘러버린 시간이 다시 연락하는 걸 힘들게 했죠. 결국 전 변화보단 익숙함을 선택했고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감정의 흔적을 지워나갔습니다. 머리 속에, 아니 가슴 속에 새겨진 몇몇 추억들도 언젠간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때론 기억이 잔인할 만큼 고집스럽다는 걸 깨달으면서...


3. 2004년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영화는 혼자가 너무나 익숙해진 사람들의 제 짝 찾기를 코믹하게, 하지만 너무나 가슴에 와 닿게 그려냅니다. 언제나 사람들 틈에, 젊은 여자들 사이에 파묻혀 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사랑은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해리(잭 니콜슨)에요. 63세인 그는 자기 나이 또래의 여성보다는 젊은 여성들을 좋아하고, 결혼은 해 본 적이 없으며, 여성들과 섹스 후에도 잠은 언제나 혼자 잡니다.

그런 해리의 필이 꽂힌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젊은 여자가 아니네요. 올해 56세쯤 된 작가 에리카(다이안 키튼)가 바로 그녀에요. 사람 사귀는 게 서툴러 자기 주변에 있었던 유일한 남자였던 무대감독과 결혼을 했었고 지금은 이혼을 한 상태입니다. 외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고, 밤이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침대 가운데서 잠을 잡니다. 그녀 역시 혼자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에요.

그렇게 자신만의 탑을 쌓아가던 두 사람이 만나면서 일은 벌어집니다. 영화는 해리와 에리카를 통해서 사랑이 이끌어내는 이런 저런 현상들을 정말 감칠맛 나게 보여줍니다. 그 즐거움, 그 아쉬움, 그 망설임……. 그들의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해리의 툭 튀어나온 배라든지 뭐든 약을 먹어야만 하는 몸 상태는 더더구나 문제가 안 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들이 부러워질 정도로 해리와 에리카는 사랑에 사로잡힙니다. 자의든, 타의든 고집스러웠던 혼자가 둘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쓴 맛 단 맛 다 본 사람들의 뜻밖의 풋풋한 사랑을 영화는 너무나 잘 전달시켜줘요.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두 배우들에게 있습니다. 잭 니콜슨은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 해리 역을 기가 막히게 연기해내고, 다이안 키튼은 귀여운 여인네(?) 에리카 역을 혀가 내둘릴 정도로 소화시킵니다. 둘의 콤비는 보는 이의 눈에선 눈물이, 입가엔 미소가 동시에 존재하게 할 만큼 완벽합니다.


4. 2004년...

전 영화를 혼자 봅니다. 옆에 연인들이 진을 치고서 아무리 깨가 쏟아져도 아무렇지 않을 경지까지 다다랐죠. 혼자에 익숙한 상황을 넘어서 혼자가 당연한 상황까지 도달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 당연함을 깨볼까 생각 중입니다. 해리가 60평생 혼자 자던 잠자리를 포기하고 에리카의 옆자리로 찾아들어갔듯이 저도 뭔가를 털어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털어내야 할 것이 무언지는 잘 알아요. 예전에도 알고 있었구요. 하지만 익숙함은 웬만해서 변화를 용납하지 않으려 하죠.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해리가 예순 셋에 느꼈던 복권에 당첨된 듯한 기분을 누려보려면 아무래도 변화가 필요할 거 같네요.

지금도 가끔 생각해봅니다. 그때 둘이라는 수에 익숙해졌더라면 지금 제 옆에 그 사람이 있었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나저나... 영화제목 참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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