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스(イノセンス, 2004)
글: 김승환
2004년 10월 08일
 |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사람으로서 전생이 있었다면, 그리고 역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또 다른 인생이 있다면. 과거의 내가 삶을 살아갈 때 현재의 나는 없었고, 지금의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 미래의 나는 없습니다. 미래의 내가 존재할 때 현재의 나는 이미 없어진 상황이죠. 현재의 내가 고민하고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한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를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과거의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절대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실존의 문제. 완벽한 무와 유의 연속.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멍해져본 적이 있어요. 존재에 대한 사유는 제 사고의 폭을 넘어서니까요. 양쪽 벽에 거울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거울에 비친 수많은 제 모습을 바라보며 그 수를 헤아려보기라도 할 때처럼 무모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만약 거울 안에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면 거울 안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 저게 정말 허상이고 내가 있는 이곳이 현실이기나 한 걸까?
존재에 대한 생각은... 아주 사소한 것에 그칠지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보기 마련입니다. 굳이 철학자가 될 필요도 없고 굳이 가방 끈이 길 필요도 없어요. 살아 움직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에 대한 고찰을 하기엔 충분합니다. <이노센스> 역시 전체적으론 존재에 대한 생각을 담은 애니에요. 하지만 이 애니는 조금은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 사이의 생존 문제와 그 존재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논란의 영역을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인체와 기계의 결합에 따른 존재의 순수성 문제, 지금 이 공간과 시간이 현실인가 가상인가를 따지는 실존의 문제 등 애니는 다른 영화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사고력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들은 과학의 발달로 육체와 정신의 연결 고리가 헐거워짐으로써 가능해지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신의 물질화... 육체를 벗어남으로써 사람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안식? 사람의 정신이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그들은 진정한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럼 육체의 속박마저 털어버린 인간들이 찾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실과 환상, 물질과 정신, 과학과 종교... 모든 것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람 자신의 가치마저 의아해진 <이노센스>의 세상은 우리에게 온통 물음표만을 선사합니다. 답은 당신들이 찾으라는 식으로. 하지만 사람이 살아온 역사 속에서 그 답을 찾아낸 자가 있었던가요?
애니메이션 자체로 돌아와서 <이노센스>는 국경의 구분, 문화의 구분도 모호한 시대에서 존재의 구분마저 모호합니다. 애니는 그렇게 질문과 모호함만을 던져줍니다. 쿠사나기의 정신은 육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육체의 대부분이 사이보그인 버크는 인간에게 이용당하다 죽은 사이보그들을 안타까워합니다. 인간은 해커들에게 기억을 해킹당해 유사 체험을 하기도 하고, 인간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적인 쾌락은 사이보그들에게도 가능해요.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어디까지가 정신세계인지, 그리고 생명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이 애니는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많은 모호함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이노센스>는 확실한 게 하나 있군요. 전편에 비해 사유의 폭과 깊이는 덜한 반면, 겉으로 드러나는 난해함은 한층 깊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주제의 전달은 분명해졌지만 어쩐지 현학적인 태도로 돌변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네요. 대중성을 고려한 오시이 마모루의 선택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적어도 그 배려 때문에 저 같은 미숙아들이 이렇게 글이라도 끼적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This article is from http://www.cinel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