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대굴대굴

바람의 전설(2004)


글: 김승환
2004년 04월 04일


1. 1999년

<주유소 습격사건>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유소란 공간에 각종 인간 군상들이 모여 벌이는 한바탕 소동을 코믹하게 그려내서 보는 이들에게 상당한 재미를 안겨줬던 영화였어요.

이 영화는 관객들 뿐만 아니라 영화 관련자들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김상진 감독이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게 이 영화부터가 아닐까 싶고, 젊은 세대들에게 영화배우로서 박영규를 확실하게 인식시킨 영화였으며, 유오성, 강성진, 유지태 등도 역시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본격적으로 굳히게 된 계기가 되었을 테니까요.


2. 2002년

<라이터를 켜라>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 이 영화가 무척이나 싫습니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 탓이에요). 상상 속의 판타지와 확고한 현실을 애매하게 섞어놓은 채 영화는 지나치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어요. 영화 속 풍자는 앵무새의 되뇜처럼 무의미해보였고 그 반작용으로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유머마저 억지 같았죠. 영화가 괜찮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제겐 그 해 최악의 영화중 하나였습니다.


3. 2004년 <바람의 전설>

영화를 즐기는 탓인지 배우보다 감독 이름에 눈길이 먼저 가는 편입니다. 박.정.우. 신인 감독이긴 하지만 그는 익숙한 이름 중 하나에요.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선물>,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등의 시나리오를 맡았던 사람이거든요.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영화도 있지만 라인업이 보통이 넘는군요.

그가 작가로 관여했던 영화 중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는 가끔씩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축소된 세상을 구축하곤 합니다. 주유소가 그랬고 기차가 그랬고 감옥이 그랬었죠.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을 풍자하기도 하면서 영화를 전개시킵니다.

그럼 직접 감독을 맡은 <바람의 전설>에선 어떨까요? 이 영화 역시 세상살이의 축소판인 건 분명해 보이네요. 춤이 좋아 사교댄스에 미친 풍식(이성재)은 자신의 꿈을 위해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제비라 부르며 경멸하는 사람들은 꿈을 좇아 달리는 개인의 고집을 이해 못하는 사람입니다. 춤을 이용해 한몫 잡으려는 만수(김수로)나 꽃뱀 지연(문정희)은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연화(박솔미)처럼 이해하고 따라주는 사람도 있군요. 그들이 모여서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부대끼는 이 영화는 영락없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렇기에 사교댄스에 미친 풍식은 세상에 설 자리가 마땅치가 않습니다. 요즘 세상은 개성을 귀히 여기면서도 은근히 다재다능함을 요구하거든요. 그런 세상에서 하나에 '미친다'는 것은 어쩌면 그밖에 모든 걸 '포기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꿈은 나래를 펴기 쉽지 않은 모양이에요.

글이 역시나 평상시처럼 심각하게(--;) 흘러갔지만 영화 자체는 꽤나 유쾌하게 진행됩니다. 그리고 분위기에 맞는 다양한 음악과 다양한 춤을 구경할 수도 있구요. 그렇게 영화는 때론 유쾌하게, 때론 흥겹게, 때론 진지하게 흘러갑니다.


4. 2004년 세상

앞서 적었듯이 많은 수의 사람들은 현실과 타협하며 현실에 짓눌려 가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그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아내는 게 가능하죠.

그러나 행복에 겨워 혹시 잊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합니다. <바람의 전설>은 그런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꿈을 접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박정우 식 판타지에요. 대리만족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든, 영원이든 꿈을 접은 세상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자서전이자 그들에게 바치는 꽃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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