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숨결은 계속되어야 한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3부작은 한국 다큐멘터리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낮은 목소리> 이전과 이후, 한국에서 다쿠멘터리라는 장르는 수용자 네트워크에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홀대받는 장르로서의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감독의 인기를 능가하는 변영주라는 개인의 불안한 산업적 동거, 그리고 한국에서 다큐로 산다는 것은.

93년 늦봄에 <낮은 목소리>를 만들자고 할머니들께 제안했다가 실패했다. 내가 늦봄이라고 기억하는 이유는 강덕경 할머니가 긴팔을 접고 반팔로 바꿔 입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때 강덕경 할머니의 목선이 되게 이뻤는데, 저 할머니 정말 죽인다고 생각했었다(웃음).

나눔의 집에 처음 찾아간 건 1월 정도부터였다. 슬쩍슬쩍 들러 할머니들께 눈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간 적이 많았다. 물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늦봄이 돼서야 구체적으로 제의를 했던 거다.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처럼,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찾아간 건데 거절당하니까 사실 화가 났다. 되게 억울하고 분했다. 충분히 얼굴 익혔다 싶었는데. 하지만 거절당하는 건 신나는 일인 거 같다. 그건 나보고 잘하라는 이야기 아닌가.

거절당하고 매일매일 지겹게 찾아갔다. 설득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아마 나중에 지겨워서 허락하신 것 같다. 만들면서는 그 분들에게 드리고 싶었다. 당신들이 싫어하는 이 작업이 때론 당신을 기쁘게 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처음으로 사회에 커밍아웃한 후로 하루에 7군데도 넘는 매체가 다녀갔다. 바꿔 말하면 하루에 악몽 같은 기억을 7번씩이나 곱씹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생활이 1년 정도 지나고 아무도 찾지 않을 때 뜬금 없이 변영주라는 인간이 나타난 거다. 나도 그들과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면 아주 저널리즘적인 다큐를 찍었겠지. 원래 내가 좀 늦다. 나한텐 그게 다행이었다.

할머니들이 나를 받아들였던 건, 영주는 위안소 시절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건 할머니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무서워서 질문을 못했던 거였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나를 이뻐했던 것이 아닐까.

할머니들과 제작진의 관계가 좋아진 중요한 계기는 합정동에서 혜화동으로 이사가던 날, 우리가 촬영을 포기하고 이사를 도운 일이었다. 요즘 들어선 그런 장면을 찍는 게 다큐멘터리 감독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난 찍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조감독 한 명이 그만두면서 그랬다. 당신은 이거 못 찍을 거라구. 난 그날 그래서 되게 슬펐다.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은 내가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1991년 7월 4일, 내가 오가와 신스케와 처음 만난 날이다. 아오키 겐스케라는 사람이 권유해서 도쿄에 있는 그 사람 사무실에서 만났다. 제작자랑 촬영감독도 있었다. 당시에 난 중앙대 대학원생이었는데 다큐멘터리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이었다.

아는 사람이 일본에 가면 많다고 해서 무작정 갔던 거였다. 그때 나는 <우리네 아이들>과 <전열>의 촬영감독이었다. "돈도 없으면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어요?"라고 물으니까 오가와 감독은 "너도 몸이 튼튼하니까 피 팔면 돈 생기겠다"라고 말했다. 자기는 그렇게 영화를 찍었다고.

또 내가 물었다.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기쁨과 미학이 뭡니까?" 그러자 오가와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 영화가 나올 지 모르겠지만 그저 사랑합니다, 라고 열 번 외쳤더니 어느 순간 작품이 나온다"고. 정말 단순하게 이야기했지만 당시 난 그의 말을 듣고 미칠 것 같았다. 이후 야마가타영화제에 내가 초청됐고, <전열> 등의 국내 다큐 작품들이 우루루 야마가타영화제에 초청됐다.

한국의 오가와는 김동원이다, 라고 믿었던 나는 함께 푸른 영상을 만들었다.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을 기획하고 동원이 형이 연출하기로 했었다. 도움을 얻고자 나카노 리에를 만났는데, 나카노가 매매춘에 관한 다큐를 남자 감독이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당신들을 도와주고 싶지 않다고 그랬다. 그래서 내가 감독을 하게 된 거다. 내가 좀더 훌륭하고 똑똑한 애였으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 쩝쩝쩝.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시사회 하던 날 <낮은 목소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92년 여름, 방배동의 아구찜집에서 훌륭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영화를 나도 만들고 싶다고. 그때 목표는 그거 단 하나였다. 94년 8월의 첫 촬영이 수요 시위를 준비하는 장면이었다.

할머니들이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한 거다. 할머니들이 그냥 뭐 촬영한다, 이런 기분이었다. 집 마당에 비둘기가 날아왔는데 카메라를 두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있는대도 마음껏 이런저런 말하시며 노시더니, 할머니들끼리 “카메라 앞에서 그런 이야기하면 어떡해” 그러니까 "괜찮아, 쟤 카메라는 괜찮아" 그러셨다.

사실 내가 나눔의 집에 갔던 날은 정확히 기억 못 하지만 관객이 1만 명 넘던 날은 기억한다. 그게 95년 4월 30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난 마스터베이션 감독인 것 같다(웃음).

사람들은 내 영화를 실제로 잘 보지 않는다. 내 영화를 지지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 보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내 영화를 정치적으로 지지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면죄부를 부여받고 싶어할 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뜻대로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서 상영하고 배급도 해본다는 것은 우리의 꿈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엔 정신대 문제를 다룬 다큐가 아니라 차라리 하찮은 주제를 가지고 다큐를 만드는 게 더 정면 승부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난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영화적으로 프로포즈를 했지만 관객과 실패한 연애를 해온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난 인기 있는 감독이 아닌 거다.

<낮은 목소리 2>를 찍어야 겠다고 생각한 건 1편을 개봉한 지 일주일이 경과했을 때였다. 할머니들이 좋아서 미친 거다. 이거 한 편 더 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빚 때문에 도망치고 싶었다. 2편은 앞으로도 내가 만들 수 없는 영화다. 몇 가지 전제 조건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50년 동안 입 다물고 살았을 것, 그래서 어떤 누구가 좋아져서 그 사람과 영화를 만들 것, 하필이면 그 영화가 자기네 동네에서 상영하게 될 것, 매일매일 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것,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편 더 만들고 싶어질 것. 이건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조건의 영화다. 내가 살면서 그런 영화를 또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머리 쓰지 않고 만든 영화다. 다음 장면 뭐 찍을까요, 라고 물으면서 만든 영화니까. 베스트였던 것 같다.

<숨결>을 찍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 사랑이 정당했기 때문에, 나의 표현도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랑은 어려운 게 아닌 것 같다. 표현이 어렵지. 그게 예술이 아닐까? 그걸 내가 못 했다고 느껴서다. <숨결>은 내 사랑을 정리하고 싶다는 욕구로 만든 영화다. 그런 점에서 <숨결>이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딴 사람도 사랑하고 싶어지니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선을 긋고 싶었던 거다. 책임감이 컸으니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숨결>이다. 첫 작품보다도 더. 난 첫사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랑을 어떻게 내 맘 속에 간직하는가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들을 존경하는 그 기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숨결>의 원칙은 그거였다.

지금은 정리하는 기간이다. 솔직히 예전에 말했던 <도쿄 엘레지>가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이러다 보면 미치도록 만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 만들게 되는 거 아닐까. 사랑을 정리하고 나니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게 두려워졌다. 다이렉트 시네마고 시네마 베리떼고 다 떠나서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있는 것 같다.

피사체처럼 되는 감독과 그렇게 되지 못하는 감독. 즉, 피사체처럼 사는 감독이 있고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해서 나의 거리감을 애써 확인하고자 하는 감독이 있다. 전자가 김동원 감독님이라면 난 후자다. 난 <행당동 사람들>을 보고 울었다. 그건 평생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난 작품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당신들을 지지할 수 있을까요, 라고 조심스럽게 묻고 있는 거다. 그것과 또 다른 길을 소피 부르디외 같은 사람이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지식인 다큐를 보여줬다. 자기를 분해하는 길을. 이렇게 합쳐보면 세 가지 정도의 길이 있는 것 같다. 자기가 그 사람이 되던가, 자기를 객관화시키던가, 아니면 그저 그 사람을 존경하던가. 난 그 중간쯤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