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름만으로 수억 달러씩 벌어들이는 배우가 지구상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언뜻 생각나는 인물은 톰 크루즈나 짐 캐리 정도다. 톰 크루즈도 고된 시간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톱스타이긴 하지만 짐 캐리 역시 불우한 어릴 시절을 뛰어넘어 견고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한 인물이다.

버스터 키튼이나 찰리 채플린의 전설에 견줄만한 연기력으로 무장된 그는 철저한 자본주의 시장 헐리웃에서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거머쥔 2천만불의 사나이다.

누구에게나 뼈아픈 기억이 있게 마련이고 짐 캐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62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실직 후 가족 전부가 타이어공장의 경비가 되어야 할 정도로 어렵게 자랐지만 연기자의 꿈만은 소중히 간직했다.

토론토의 한 방송국에 자신이 지을 수 있는 80가지 표정이 담긴 이력서를 보낸 건 불과 열 살 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일찌감치 정해버린 그는 열 다섯의 나이로 토론토의 유명한 코미디 클럽(Yuk Yuk's) 무대에 올라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의 첫 발을 내디뎠다.

몇 년간을 캐나다에서 보낸 후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라스베이거스의 한 코미디클럽 사장의 제의로 열 아홉이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지미 스튜어트 등의 흉내를 잘 냈지만 무엇보다〈황금연못〉에서 헨리 폰다의 인상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해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며 단숨에 코미디클럽을 장악했다.

그러던 그에게 첫 번째 성공의 기회가 찾아왔다. 90년 폭스 케이블TV의 시리즈〈인 리빙 칼라(In Living Color)〉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이 시리즈를 통해 서서히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된 그는 몇몇 영화의 단역과 조연을 거쳐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점령한〈에이스 벤추라(Ace Ventura:Pet Detective)〉에 출연한다.

제작비 1,200만 달러. 출연료는 불과 35,000 달러에 불과했던〈에이스 벤추라〉는 개봉 첫 주에만 7,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대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영화 개봉 일주일 만에 그의 몸값은 무려 700만 달러로 뛰었다.

〈에이스 벤추라〉에 이어 SFX와 짐 캐리의 변화무쌍한 표정연기가 조화를 이룬〈마스크(Mask)〉, 그리고〈덤 앤 더머〉는 미국 내에서만 총 5억5천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리며 짐 캐리를 단숨에 2천만 달러 짜리 초특급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관객들은 2천만 달러 짜리 짐 캐리를 부담스러워 했다.〈케이블 가이(Cable Guy)〉에 등장한 그를 보고는 당혹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로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지만 결과는 크게 빗나가고 말았고 짐 캐리는 한동안 주춤해야만 했다.

하지만 곧 전공분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끝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사실, 〈케이블 가이〉가 그에게 악몽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97년 MTV영화상에서 최우수 악당상과 최우수 코미디언 상을 수상했고, 이후 정신을 추스르고 출연한 톰 새디악 감독의〈라이어 라이어(Liar Liar)〉가 순식간에 1억 달러 고지를 넘어서는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톰 새디악은 짐 캐리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는 짐 캐리를 발굴해〈에이스 벤츄라〉에 등장시켰으며〈케이블 가이〉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수렁에서 건져 올린 사람도 다름 아닌 톰 새디악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감독으로 유명한 피터 위어의〈트루먼 쇼(Truman Show)〉는 코미디 못지 않게 드라마까지 멋지게 소화해내는 연기자로서의 짐 캐리를 만천하에 알린 작품. 천박한 코미디 배우로만 여겼던 그의 연기에 평단과 관객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골든글러브 드라마 부문의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다.

아직 국내엔 개봉되지 못했지만 요절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의 일대기를 담은〈맨 온 더 문(The Man on the Moon)〉는 그의 연기력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감독은 체코 출신의 거장 밀로스 포먼.

앤디 카우프만은 78∼83년에 방영된 TV 시트콤〈택시〉의 괴팍한 정비사로 나와 인기를 끌었던 인물. 하지만 정작 그의 전국적 명성은 연기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여성과 시합을 벌인 전국순회 레슬링 성대결로 얻어졌다. 84년 36살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열광적 팬들만큼 많은 비난을 몰고 다녔던 이 괴이한 코미디언의 삶에서 짐 캐리는 관성에 안주하지 않는 코미디 정신의 정수를 발견했다고 한다.

〈맨 온 더 문〉에 대한 짐 캐리의 애정이 어느 정도냐 하면 주연을 맡기 위해 4개월 동안 시나리오 작가와 제작 스탭들까지 고용해 오디션 테이프를 직접 제작할 정도였다고. 노력만큼 결과도 좋아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과 골든글러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최신작은 화장실 유머의 선두주자, 페럴리 형제가 감독한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Me, Myself & Irene)〉. 인간의 양면성이 서로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 영화로 짐 캐리의 진가를 엿 볼 수 있다. 그가 아니면 누가 우울한 표정의 찰리에서 극악무도한 행크로 돌변하는 연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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