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승욱 감독님, 안녕하신지요.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이렇게 메일로나마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 생각해보니 멀리서나마 뵌 적이 있습니다. 5-6년쯤 전에 부산 국제 영화제 때 '이방인' 영화 상영 후에 감독님이 인사하신 적이 있었지요, 그 때 영화 상영 후에 이어진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에 극 영화의 메시지가 더욱 또렷하게 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랑, 영화 상영 후에 이어진 다큐멘터리 둘 다 참 마음 따뜻하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 관객도 많지 않았고, 상영 후에 감독님께 질문한 사람도 없었고, 어떻게 보면 시사회 분위기가 영화 자체보다 더 쓸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워낙 '예술'로서의 영화 자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긴 하지만, 저에겐 영화 보면서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 과정에서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또 어딘가로 떠나고' 하는 모습이 많이 와 닿았었는데 말입니다. 특히 '이방인' 영화의 경우에는 영화 자체를 볼 때보다도, 영화 속의 이야기를 머리속에 상상하고 있을 때 더 감동이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마치 어떤 음악 평론가가 말하길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실제로 듣는 것보다는 악보를 보면서 음악을 상상할 때 더 큰 울림이 있다'고 한 것처럼 말이지요.

참, 제 소개가 좀 늦었습니다. 저는 현재 독일 보쿰에서 유럽학을 공부하고 있는 20대 후반(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만...^^)의 석사 과정 대학원생입니다. 올해 초 2년여만에 한국에 가서 DVD로 처음 '나비'를 보았고, 독일로 돌아와서도 지금까지 몇번이고 계속해서 다시 돌려 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방식이 조금은 낯설기도 했지만, 지금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반가왔고, K가 몇년 뒤 새로운 손님을 태우는 장면에선 정말 지금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더욱 새로와져서 약간은 현기증마저 나더군요.

저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은 유키의 출산 장면보다도, 안나가 유키를 병원에서 빼낸 후 케이블카가 있는 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란 곳이 부산인지라 아마도 이곳 송도 거북섬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년쯤 전까지 그곳엔 회집도 있고 건물 옥상엔 수영장도 있던 곳이었는데, 어렸을 적 아버지랑 함께 흔들리는 구름다리 타고 수영장까지 가서 시간 보냈던 기억이 나더군요. 아마 그때의 제 기억과 현재 그곳의 폐허같은 모습, 영화 속 유키와 안나의 맘이 겹쳐져 떠올랐나 봅니다.

그리고 오랬동안 생각해보게 되는 장면은 안나가 부산의 거리를 다니면서 하던 대사, '독일선 자신이 이방인이지만 여기선 그저 여러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말을 자주 되새겨보곤 합니다. 저는 원래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의 고향이고, 우리나라 택시기사 분들의 고충은 택시회사 주인들보다는 멀리 있는 독일 택시기사들이 더 잘 알거라는' 주의인지라, 사람이 어디에 살든 자기 맘 먹기에 따라 그곳이 고향일수도 낯선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인데, 독일서 3년째 살고 있는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암튼 지금도 화두처럼 오랬동안 머리속에 남아있는 장면입니다.

문승욱 감독님의 영화 '나비'는 맘이 좀 우울할 때마다 보면 역설적으로 힘을 얻게 되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나온지도 오래 되었고, 감독님 이 글 읽게 되실지도 모르겠지만, 감독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보냅니다. 감독님 지금은 아마 다른 작업 중이거나 벌써 마무리 중이실지 모르겠습니다. 감독님은 영화 '나비'를 만드실 때의 기억이 지금 어떻게 남아있을지 궁금합니다. 디지탈 영화를 통한 새로운 시도,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관점,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르게 생각하시는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저에겐 '이방인'이나 '나비' 모두 하나의 이야기같은 느낌입니다. 감독님 앞으로 하시는 일들, 작품 모두 언제나 사람들 마음 속에 울림이 있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03년 11월
독일 보쿰에서
박인효(inhyo@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