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을 꼬옥 감았다가 떴을 때,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언제나 우리를 당황케 한다. 그 당황함은 내가 보는 세상과 타인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불안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죽음이란 단어를 거침없이 내뱉는 작고 어린 소녀 아나는 거기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 아나의 세계는 현재와 과거가 공존한다. 아주 담담한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는 듯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기억들 속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죽은 엄마의 환영은 아나를 다른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끈이다. 엄마의 죽음은 어두운 집안에서 방학을 보내며 여러 가지 죽음의 일상에 놓인 아나가 시도하는 이모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작은 항거의 이유이기도 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져 버릴 환영임을 깨닫게 될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지탱시켜주는 명목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의 동요를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스페인적인 주제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카를로스 사우라는 부르주아 가정의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스페인의 역사적 이미지들을 겹쳐낸다. 남성의 권위와 독재에 눌려 살아온 할머니, 어머니, 아나가 이어가는 가정의 모습은 곧 스페인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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