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개월을 난 무사시노에 바쳤다. 길고 어두웠던 고3 생활은 드디어 도쿄행 기차표로 나에게 쥐어졌다.

이제 시작이다.

내가 살던 홋카이도에는 아직도 시린 눈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그러나 도쿄는 벌써 벚꽃이 한창이다.
눈처럼 내려와 내 품안에 안기는 꽃잎들... 왠지 두근거린다.

처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홋카이도처럼 먼 곳에서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왔냐는 질문에 난 대답할 수 없었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그리고 낚시부에 들기로 했다.
허공을 향해 낚시줄을 던지면, 맑고 포근한 4월의 하늘에는 하이얀 설렘이 두둥실 떠있다.

그리고 비오는 4월의 오후. 나는 다시 선배를 만났다.
내 머릿속에 마치 그림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선배의 모습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내가 대학에 갔을 때 담임선생님은 기적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의 기적이라고 하고 싶다.

April

4월은 푸르게 물오른 버드나무가 너울대며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봄바람에 나부끼는 여인네의 치맛자락이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계절이다.

게다가 일본의 4월은 대학교 신학기가 시작되는 때 이기도하다. 우리 나라와 다를 바 없이 칠흑 같은 청소년기를 끝낸 대학 신입생들에게 4월은 신비와 기대감으로 술렁이는 일생일대의 대변혁기로 기억될 것이다.

<4월이야기>의 주인공인 '우즈키'역시 고교 시절의 마지막 6개월을 도쿄에 있는 대학에 오기 위해 바쳤고, 그 보답으로 달콤한 도쿄의 꽃향기를 맡게 된다. 그녀에게 있어 4월은 난생처음 집을 떠나 성인으로 독립된 첫 삶을 맞이하게 되는 가장 큰 변화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오랜 동안 남몰래 간직한 달콤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낭만과 희망이 충만한 계절이다. 4월, 아름다운 자연의 발화 속에서 피어나는 성숙한 여인으로의 꿈은 풍만한 대지를 힘입어 싱그럽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Musashino

일본인들에게 '무사시노'는 도쿄라는 거대 메트로폴리탄의 주변부, 즉 휴식과 아늑함이 감도는 노스탈지아 같은 곳이며,<4월이야기>에서는 주인공 '우즈키'의 첫 사랑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이다. 지리적으로도 이곳에는 '무사시노 대학'을 비롯하여 '무사시노 음악대학', '무사시노 미술대학' 등이 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향기 나는 전원 지대이다.

현재 일본 문학계의 핵심 인물인 '무라카미 류'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출신이며 '무라카미 하루키'도 한 때 이곳에서 작은 재즈 카페를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작은 거리와 낮은 담의 소담한 집들 그리고 개울이 흐르고 수목이 어우러진 곳.

이와이 슈운지는 '무사시노'가 상기시키는 주인공 '우즈키'의 그리운 첫 사랑에다 꿈결같은 안락함까지 더한다. 그래서 더디게 포착되는 '무사시노'의 풍경은 마법에 걸린 성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 속에서 '무사'영화를 굳이 삽입시킨 이유도 거기에 있다. 소리값이 같은 두 단어의 친밀감이 주인공 '우즈키'의 떨쳐 버릴 수 없는 첫 사랑의 마르지 않는 그리움을 은유한다.

Ikiteita Nobunaga

주인공 '우즈키'가 극장에서 괴상한 사내를 만나는 장면을 위해 삽입된 꽤 긴 분량의 <이키테이타 노부나가(살아있었던 노부나가)>는 이와이 슈운지가 직접 만들었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영화로 '본능사의 변'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현재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트랜디 배우 '에게치 요스케'와 '코메코메클럽'이라는 그룹의 리드보컬을 하고 있는 '칼 스모키 이시이'가 출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 영화로 삽입되는 작품들은 대게 감독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와이 슈운지는 본인이 직접 10분 분량의 사무라이 영화를 직접 만들었다.

'무사' 혹은 '무사시노'가 환기하는 첫 사랑에 대한 '우즈키'의 무의식의 심층을 잡아내기 위한 소중한 장치인 것이다. 이와이 슈운지의 치밀한 순발력과 재치를 또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Rockwell Eyes Inc.

이와이 슈운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영화 제작사인 '록웰아이즈'는 95년 설립되었다. <4월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처음 탄생한 영화이고, 이전에는 <스왈로우테일> 제작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원래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며, 함께 일하는 스탭들이 정해져 있기로 유명한 이와이 슈운지가 자신만의 창작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심지어<4월의 이야기>의 오리지널 포스터도 이와이 슈운지가 직접 만들었으며, 삽입된 음악들을 위한 세션 및 작 편곡에서도 이와이 슈운지가 직접 참여했다. 감히 작가주의로 불리 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은 이런 독립 프로덕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