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데이즈]의 시대 배경은 2142년. 무대는 오염물질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에코반이라는 도시와 선택받지 못한 주변인들이 사는 에코반 주변의 마르라는 도시입니다. 물론 이 두 세계 사이에는 심각한 계급차가 존재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에코반 사람들은 오염 물질이 사라져서 고민이 많은 모양입니다. 어떤 캐릭터들은 심지어 마르 사람들이 죽건 말건 주변 유전을 불질러 오염 물질을 만들자고 주장하네요.

여기서부터 전 어리둥절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이 세계 사람들은 간단한 열역학 제2법칙도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불지를 유전이 있다면 그냥 유전에서 에너지를 얻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약 에코반이 그렇게 꾸준히 오염물질들을 먹어삼켰다면 오히려 마르와 에코반이 있는 시실섬은 청정지대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지구 자체도 그렇게 더럽지는 않을 겁니다. 지구는 자체 정화 기능이 있고 살아남은 지구인들은 모두 그 섬에 박혀 있는 데다가 에코반은 오히려 꾸준히 오염물질을 먹어삼키고 있으니 지구의 유일한 오염원은 마르란 말이에요.

하여간 영화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세 명의 주인공들을 따라갑니다. 시몬과 제이는 에코반에서 괜찮은 자리를 맡은 모양이고 수하는 마르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제이는 죽은 줄 알았던 수하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고 에코반과 마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언론 시사회 인터뷰에 따르면 시몬이 현실을, 수하는 이상을, 그리고 제이는 방황하는 자아를 상징한다나요.

슬슬 인물 구상 단계에서부터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애당초부터 이들에게 제대로 된 캐릭터를 줄 생각을 안한 거죠. 캐릭터가 고유의 힘이 없다면 상징은 힘을 잃어버리는 데 말입니다. 당연히 이 세 주인공들은 밋밋합니다. 남자 주인공들은 턱근육에 힘주는 걸 연기라고 생각하고 있고 여자 주인공은 척추결핍증을 착 달라붙은 유니폼으로 커버하려고 하고 있지요.

이런 애들이 주인공이니 이야기가 흥미진진할 리 없습니다. 개성도 없고 멋도 없는 아이들이 심각하게 폼 잡으며 넋두리를 늘어놓는 게 전부지요. 왜냐? 이 영화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심각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젠장할.

[원더풀 데이즈]는 그냥 심각한 영화가 아니라 클리셰로 도배가 된 심각한 영화입니다. 시몬, 제이, 수하의 삼각 관계부터 뻔하디 뻔한 구도입니다. 여기까지는 '보편적'이고 '원형적'이라고 이해해준다 치더라도 그 뒤의 문제점은 심각합니다. 자, 위의 인터뷰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주인공이어야 할 사람은 제이입니다. 설정상 유일하게 유동적인 캐릭터여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각본가들이 과연 이 캐릭터에게 그에 어울리는 역동성을 주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제이는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턱에 힘 준 우리의 남자 주인공 수하에 끌려갑니다. 질질질... 남자 주인공들은 그 동안 뭐하냐고요? 이미 여러 번 말했잖아요. 턱에 힘주고 있다고요.

[원더풀 데이즈]의 각본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나쁜 점들만 골라서 배운 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생기 없는 대사는 외래어와 기술 용어에 대한 페티시즘에 빠져 있고 허세와 폼이 스토리를 넘어서며 진짜 감정 대신 감상과 넋두리로 가득합니다. 이런 걸 깊이로 착각하고 있으니 그러는 동안 SF적인 가치나 드라마, 캐릭터들이 실종되는 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액션도 빈약합니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기술적인 면은 어떨까요? 이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각본 때문이 아니라 셀 애니메이션과 컴퓨터 그래픽, 미니어처 촬영을 결합한 스타일일테니까 말입니다.

그 결합은 당연히 절충주의적입니다. 낯설지는 않군요. [타이탄 A.E]가 바로 그런 스타일의 영화였으니 말입니다. 단지 [원더풀 데이즈]는 그 절충주의적인 성격을 일부러 감출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차가운 3차원의 CG 기계들 사이에서 셀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그럭저럭 고유의 스타일처럼 보이고 이론상 주제와도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딱 한 장면 미니어처 모형들이 노골적으로 튀는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해요.

무국적인 배경 속에서 한국 영화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수하가 맨 처음 에코반에 잠입할 때 쓴 가면은 하회탈입니다. 종종 한글 간판들이 등장하고 한글 철자를 풀어쓴 암호가 쓰이기도 하지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나 전체적인 결과는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지난 십 여년 동안 컴퓨터 그래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왔으니 말이에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기계들의 상호 작용은 그렇게까지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셀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나쁘지 않지만 무개성적이며 생기를 느끼기엔 지나치게 폼을 잡고 있는데다가 종종 CG 기계들에 눌려버립니다.

여기에 심각한 아이러니가 놓여있습니다. 영화는 소박하게나마 에코반으로 대표되는 인공적인 세계와 자연/인간을 대립항으로 잡아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들은 모두 CG 기계들입니다. 셀 캐릭터들은 이 번들거리는 기계들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만한 존재감이 없거든요. [원더풀 데이즈]의 시각적 이미지들은 주제를 살리는 대신 오히려 죽이고 있습니다. 암만 봐도 이 영화는 이야기의 설정을 거꾸로 잡은 것 같습니다. [원더풀 데이즈]가 스타일에 어울리는 진짜 내용을 담으려고 했다면 셀에 그려진 하찮은 인간들을 무시하고 밟아버려야 했어요. 이 영화의 스타일에 어울리는 진짜 '내용'은 묵직한 기계들의 충돌이었을테니 말입니다.

[원더풀 데이즈]는 실패한 실험입니다. 영화는 야심으로 가득하지만 그를 담을 만한 실체가 없습니다. 이 영화를 시행착오의 교훈으로 삼을 다음 작품들이 나오길 바랄뿐입니다.

기타등등

저같으면 오염물질을 먹고 사는 도시를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섬 대신 먹을 게 많은 대륙 주변에 세울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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