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희의 씨네마레터 #5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 아무리 평균수명이 80세가 넘어간다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여기저기 죽을 가망성으로 쳐서 요즘같이 갖가지 경우의 수로 조합된 수많은 죽음의 가능성이 팽배했던 시대도 없었던 듯 합니다. 전기가 없었던 시절엔 생각도 못했을 감전사 라던지(뭐 재수없으면 맨땅에서도 벼락을 맞았던 극히 드문 일도 물론 있었겠습니다만..) 여전히 교통사고율 1위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씩 생과 사를 달리하는 교통사고사도 따지고 보자면,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 혹은 발명되기 전에는 아예 사인에도 끼지 못했던 일들이죠.(뭐 역시 간혹 가다 말에 밟혀 죽던지, 수레에 깔려죽은 일도 왕왕 있었겠지만...). 더구나 사고가 났다 하면 한방에 이삼백 명씩 재가 되어버리는 비행기 사고역시 새한테 물려죽는 일이야 있었겠습니까마는, 생존률로 치자면 거의 살아 남기 힘든 죽음의 복병이라 할 수 있죠. 요새야 좀 뜸합니다만, 한참 다리 무너지고 백화점 붕괴될 때 신문마다 지겹게 찍어대던 ‘인재’라는 말이 이제는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매일같이 차 타고 다니고, 한강대교를 수 천번이 넘도록 아침저녁으로 건너 다녔고, 심심하면 백화점으로 쇼핑가는 게 일인데도, 별탈 없이 23년을 살아온 게 신기할 정도로 우리가 사는 오늘이란 매순간 죽음의 위협과 아슬아슬하게 타협해가는 힘겨운 지속선인지도 모르겠네요. 여전히 거대한 자연 앞에 힘없는 인간이건데.. 이렇게 자신이 이루어 놓은 문명 앞에서 조차 목숨을 담보로 살아야 하는 것이 어느덧 오늘의 우리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만, 그렇게나 운 좋게(?) 살아왔는데도 자꾸만 죽음과 맞닿으려는 쾌락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이나 간뎅이도 함께 커졌나 보구나를 역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전엔 생각치도 못했던 수많은 죽음의 가능성 속에서 든든하게 단련된 담력때문인지, 사람들은 점점 더 죽음에 가까운 자극을 원하는 것 같긴 합니다. 마치 “난 이런 것은 끄떡없이 견길 수 있어! 이 정돈 껌이쥐..이럴 때 일수록 든든해야돼!(핫브레이크 선전을 떠올리면서..-_-)” 하는 양 말입니다. 뭐 저도 놀이 공원이라면 죽고 못살 정도로 좋아하지만, 놀이 기구라 하는 것도 어떻게 하면 좀더 죽음에 가까이 이르는 공포를 만끽할 수 있을까를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물은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점점 더 강하게 자신의 깊숙한 공포심을 자극해주길 원하는 군중들의 미묘한 매저키즘을 충족시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띄고 하루가 다르게 아찔해져 가는 놀이 기구들… 어린시절엔 어린이 대공원에 있는 바이킹만 한번타도 까무러칠 듯 놀랐었는데.. 이제는 저 뒤집힐듯한 스페인해적선 맨 뒷자석에서도 두 손 번쩍 들고 시시하다는 듯 눈을 내리깐 채 콧노래도 예사로 부를 수 있으니.. 놀이동산도 돈 벌어 먹고 살려면, 가끔씩 사람을 한 두 번 떨구어서 죽이지 않는 게 이상할지 모르죠. 항상 앞을 향해 진보해온 인류는 그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채로 조금씩 조금씩 생명연장의 꿈(?)을 향해 저 칼끝 같은 죽음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공포로 단련된 인류에게 죽음따윈 두렵지 않다!” 뭐 어쨌건 왠만한 걸로는 상대도 안되기 때문에 대중 매체들은 ‘어디까지 가나 보자’라는 비꼼까지도 코방귀 한방으로 날려보내며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죽음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가 봅니다. 감히 인간한계를 운운하면서 말입니다.

몇 년 전이었던가… 실베스터 스탤론의 근육무게에 혹시나 암벽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가슴 졸이며 ‘클리프 행어’를 보신 분이라면, ‘버티칼 리미트’와 비교해 정말 그 짧은 시간 안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회상해 보건대 그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엔 정말이지 ‘아찔한 공포를 주기엔 충분했던’ 그런 영화였으니 말입니다. 여주인공과 스텔론이 손을 놓치는 장면에선 많은 여자분 들이 질끈 눈을 감았을 것이고, 많은 남자분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겠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던 ‘클리프행어’가 개봉된 지 불과 7년밖에 안 지났건만 사람들의 구미는 너무나 초고속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인지, 요즘 같은 때엔 ‘클리프 행어’를 아찔하다며 장사진을 치고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은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7년이라는 시간동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제는 초등학생들도 채팅으로 번개를 하는 마당에- 기술이 선사한 편리한 기계 앞에서 감히 온세상을 향해 자신의 익명성 뒤로 숨겨왔던 꿈을 맘껏 펼쳐왔으며, 갖은 자극들에 지쳐 이제는 엽기라는 단어를 일상으로 즐기는 키취적 취향을 대중 앞으로 끌어 내어 공통으로 향유하며, 난자 된 피투성이 따위는 예사로 여겨왔으니 말입니다.

분명 ‘버티칼 리미트’는 들인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박진감 넘치게 극사실 주의를 살린 화끈한 영화임엔 틀림없습니다. 엄청난 기술력과 과감한 연출력으로 완성된, 심장을 죄게 만드는 짜릿함은 최첨단의 설비에 힘입어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죠. 하지만, 제발 그만 떨어지기를 바라는 한계점에 다다라서까지 등장 인물들을 K2의 산등성이로 쉴새 없이 내동댕이치는 영화를 보고 있자니, 윙윙 울리는 편두통을 참아두었어도 왠지 서글퍼지는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나의 친구들은, 오늘날의 나는 저 정도의 자극에만 겨우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무감각의 감성의 소유자가 되어 버렸다는 걸 아프게 되씹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영화를 찾는 분이라면 메가박스의 돌비스테레오 음향에 실려 쉴새 없이 심장이 옥죄는 쾌락을 맛보길 지극히 권하겠습니다만, 차라리 인간적인 눈물 한 방울만큼이나마 뭉클 할 수 있는 다른 영화를 선택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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