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ry의 영화읽기 #5

장르의 컨벤션... 서울예전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영화족보가 있었으니... 그 족보대로 영화를 만들면 성공할지어다...

감독: 김정권
출연: 유지태, 김하늘

오랜 충무로 연출부 경험은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냉정한 자본의 논리와 힘에 부치는 영화만들기의 노동을 거치면서도 자신에 대한 고민을 놓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영화감독으로서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권 감독에게 있어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용병이반>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등으로 이어지는 오랜 연출부 생활과 서울예전때부터의 영화만들기의 고민들은, 자기 자신이 버려야 할 부분과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을 선별 결정하는데에 있어서 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데뷔작인 <동감>은 산뜻한 영화가 되었다.

우디 앨런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Everyone says I love you)>는 장르의 컨벤션을 유쾌하게 이용한다. 우디 알렌은 관객과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뮤지컬 장르의 비현실적인 로맨틱함을 자신의 작품에 충분히 이용한다. 이미 상호간에 약속되어있는 자신의 영화속에서 우디 알렌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현실속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의 연속일지라도, 그의 영화만큼은 그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뛰어넘는 영화적인 컨벤션속에 존재한다. 김정권감독 또한 이러한 컨벤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1979년의 여자와 2000년의 남자의 교신과 아련함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에 있어서 그 어떤 형식적인 모험도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센스있는 유머와 가슴 한 곳이 찌릿한 슬픔과 그리고 너무나도 쿨한 끝맺음뿐이다.

[시나리오의 승리]라고 표현한 평론가 심영섭씨의 20자평은 너무나 정곡을 찌른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신비한 우연으로 서로 교신하게되는 두 사람의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매체는 오직 영화밖에 없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이야기의 부드러운 완급조절과 센스있는 유머를 겸비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1979년과 2000년의 교신이라는 비현실성은 로맨틱 멜로라는, 감독 자신은 의아해하는 장르의 컨벤션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진부하고,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상사일 뿐이다. <동감>을 보기 위해서 6000원을 내고 극장으로 들어오거나, 비디오를 대여하는 관객들은 이미 그러한 컨벤션의 영향권속에서 영화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이미 현실과 비현실적이라는 경계와 구분은 영화라는 매체를 받아들이는 지금의 세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화라는 매체만큼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영화는 CG의 도움을 얻기전에 이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살고 있지 않은 다른 형태의 시공간의 분할과 통합을 보여준다는 면에 있어서는 모두 특별한 효과Special Effects를 갖는 존재인 것이다.

<동감>은 대조의 영화이다. 과거의 소은과 현재의 인이라는 두 개의 시공간을 대비시키고 두 개의 차원이 소통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화면의 분할과 카메라 워킹, 그리고 사운드를 통해 영화가 오래전부터 자신의 표현 관습을 만들어온 소재이다. 특히 남자와 여자라는 두 핵을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애정물의 경우 두 인물이 서로를 물들이는 과정을 표현하는 영화적인 표현방법은 이미 하나의 컨벤션을 이루고 있다. 김정권 감독은 79년의 소은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느낌을 자아내는 옐로우톤을 사용한 반면에 2000년의 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블루톤을 사용한다. 소은과 인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정반대방향에서 움직여와서 심지어는 장면이 분할되어 두 사람이 한 shot안에 보여지고, 소은을 감싸는 피아노 선율과 인을 감싸는 첼로선율, 그리고 둘을 함께 감싸는 첼로와 피아노의 협연까지 두 시간과 공간,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표현하는 영화적인 표현방법의 대조는 그 밖에도 수없이 찾아진다. 그것들은 모두 영화적 표현의 cliche이면서도 가장 관객에게 편안하게 전달되는 방법이다. 김정권 감독은 여기에 이쁘고 그림같은 미장센이라는 또 하나의 비장의 카드를 들이민다. 이쁘고 순수한 여주인공과 착하고 매력적인 남자주인공, 그들을 둘러싼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그는 Art Design에 몹시 공을 들인다. 덕분에 이와이순지와 비교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하지만, 이것 또한 영화적 컨벤션을 따르는 요소중에 하나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오랜 충무로 내부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러한 소재와 표현에 있어서의 영화적 관습에 대한 완전한 이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빛나게 만드는 요소는 시나리오임에 틀림없다. 전반부의 유쾌함과 후반부의 쓸쓸함이 적절하게 균형을 갖고 있으면서 각각의 상황속에서 알맞은 유머감각을 보여주고 있는 감각은 그 리듬감에서나 결말의 산뜻함에서 어느 모로 보아도 특출난 상업적인 감각이 돗보인다. 김정권감독을 뒷받침한 시나리오작가의 이름속에서 장진감독의 이름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김정권감독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영화적 톤의 균형감각은 장진감독의 시나리오에 힘입은 바 크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블랙마리아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들이 가지는 초현실적인 상상력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 시대에서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의 구분은 모호하다. 영화적 표현, 특히 장르적 컨벤션은 100년의 기간동안 사람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상업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이러한 컨벤션을 충분히 숙지하고 이용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김정권 감독 자신이 말했듯이 <동감>은 기본적인 컨셉만을 가지고 출발한 영화이다. 그것의 발전과 변환은 상업적인 것이겠지만, 산뜻한 것이기도 하다. 소은과 인의 캐릭터는 평면적이다. 그들의 전형성은 그러나 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1979년과 2000년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객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시선을 모두 투사하고 있는 인물들은 스테레오타입이지만 충분하다. 상업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성룡이 나오는 영화에서는 항상 주인공이 총을 잃어버리고 맨손으로 싸우게 되고, 관객은 성룡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감>을 예술적인 영화로서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동감>이 창조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컨벤션내에 머물러 있는 것을 탓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제 한가지 잣대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 이어 오랜만에 상업적이고 장르적인 관습에 충분히 충실한 영화가 제작되었고, 그것에 진부함을 느낄것인지 편안함을 느낄것인지는 관객의 몫이자 김정권 감독 자신의 운일 것이다. 서울예전 출신이자 <소풍>의 감독인 송일곤이라는 걸출한 영화인과 동기인 김정권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영화적인 재능에 있어서 송일곤 감독의 재능은 특출난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정권 감독이 오랜 연출부경험을 통해서 배워온 관객과의 교감일지도 모른다. 보는 이로 하여금 동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불행히도 한 사람의 영화적인 표현력만으로 벅찬 경우가 많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행위가 관습적인 나레티브구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고 변형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김정권감독은 이런 점에서 영화에 대해 얼마만큼은 알고 있는 사람이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울예전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영화적 컨벤션에 관한 족보를 몰래 훔쳐본 듯한 데뷔작을 만든 또 한명의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정권감독이 그 족보에만 안전하게 의존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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