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안썸머>의 이야기 구조는 멜로 드라마의 구조에서 풀자면 상당히 간단하다. 곧 다가올 지 모를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 한 남자가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살리려 하고 또 그렇게 서로 사랑하다가 다시 누명을 쓰게 돼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남자는 슬퍼한다. 그저 이거다. 하지만 깔끔한 시나리오에 멜로와 더불어 법정물까지 아우르는 <인디안 썸머>는 그리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선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당연히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시작 후 약 30∼40분에 그리 다른 이야기가 없다. 그저 주인공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상황을 보여줄 뿐 그들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어 나가는 부분은 그보다 훨씬 지난 후이고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둘의 사랑이 전개될 때쯤 다시 또 하나의 반전이 시작된다. 그들의 사랑 중간 중간에는 눈물을 쏙 빼게 할 만한 부분도 있고 깜짝 놀라게 할 만한 flash back도 있다.

당연히 시나리오가 흐름을 독특하게 잡았으니 이야기와 더불어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진폭 또한 여느 영화와 다를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대부분의 상업 영화들을 간파하고 있는 관객들은 조금은 황당해 할 것이고 그러기에 조금은 색다를 것이다. '색' 하니 생각나는데. . 요즘은 확실히 영화에서 크게 차지하는 부분이 마케팅인데 홍보효과에 배우들이 토크쇼에 나오는 것보다 요즘은 포스터도 크게 승부를 한다. 물론 예고편의 힘도 있지만 난 포스터에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최근 큰 흥행 몰이를 하고 있는 <친구>나 <인디안 썸머> 포스터는 최근 관객들의 성향에서 약간 비껴가 오히려 빈틈을 공략하는데 그것은 GRAY TONE의 효과이다. 최근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대부분 너무나 시대를 앞서가려는 느낌이 있는 데 반해 <친구>와 <인디안 썸머>는 조금 뒤쳐진 듯한 회색에 가까운 흑색 (별로 궁금하지 않을테지만 GRAY ZONE SCALE로 따지면 ZONE 5 정도. .) 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인디안 썸머>는 포스터에서 보여준 조금 퇴색된 듯한 세련됨(?)을 영화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한다. 그 색의 대비들. .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위에서 말했던 이야기의 타이밍과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가 아닐까 싶다.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똑같은 안경, 똑같은 복장을 하고 깡패도, 변호사도 할 수 있는 배우, 박신양 분은 사실 기존의 영화들과 다른 연기를 하진 않았다. (사실 박신양 분이 하는 연기는 거기서 거기다. 그 연기가 어떤 배역이든 어울린다는 게 장점이지. .) 하지만 노효정 감독이 구상하고 셋팅 해놓은 이야기와 장소에서 그는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의 연기에 튀지 않는 이미연 분의 연기. 그리고 조금은 과하게 인물을 만화적으로 만들어 놓은 조연들의 연기는 튀어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아야 할 부분이 적절해 요소 요소에 웃음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관객이 느낄 가장 큰 기분은 허탈함일 게다. 예상할 수 있는 것에서 그 예상에 부합되는 이야기로 충족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세 개의 단순한 듯 한 멜로 드라마의 구조 안에 들어있는 법정물의 기운 (물론 그걸 법정물 이라고 할 순 없다. 죽이느냐 마느냐 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들의 사랑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설정이었으니까. .) 은 마지막 이별의 아픔에 쉽게 눈물을 흘려줄만한 여유를 주지 못했으니까. .

조잡한 이야기와 생각 없는 배경이 어이없게 만드는 영화가 많은 요즘 <인디안 썸머>는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수작이다. 절제된 이야기와 초반에는 정신없지만 차츰 공간의 활용을 극대화한 법정의 모습들은 그야 말로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내 의견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