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희의 씨네마레터 #4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버드나무 잎을 가지고 한 장씩 떼어내며…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뇌까리던 그런 기억은 누구나 한번쯤 가지고 있을법합니다. 은희경이 ‘삶은 자신의 마음대로만 인간에게 관대하다’ 라고 처절하게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은 때때로 내가 간절히 원하는 방향보다는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가 더 많기 때문일까요? 그런 작은 확인물로라도 자신의 바램을 관철시키기를 원하는 우리네의 마음이란 그 일이 크건 작건 관계없이 한 장 한 장 떼어내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끝없이 자신의 삶에 주술을 걸어 놓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뭇잎 점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삶은 참으로 무심한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손가락을 떠나 무심히도 날아가는 나뭇잎을 보며 그래도 우리가 미소 짓는 것은 항상 실망하고 좌절할지언정 우리들의 마음속엔 삶을 향한 조그마한 애착과 희망이 그 순간에나마 충만할 수 있기 때문일테죠.

'크래쉬’에서 홀리 헌터가 그녀의 정염을 결렬하게 불사르던 세차장은 조금은 더 녹록한 애로티시즘을 담을 만도 하건만 어찌 된 셈인지 봉수에겐 큰소리로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작은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나귀 귀 임금님의 이발사가 대나무 숲 구덩이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하며 쌓인 마음을 몰래 풀어 놓는 것처럼 말이죠. 나이는 한 살 두 살 먹어가고, 꼭 필요하다 싶을 땐 허전한 옆구리를 더욱 움츠릴 수밖에 없는 봉수군. 23년 동안 지각한번 안 하는 바른생활맨으로 성실하게 살아왔건만 빛 좋은 개살구라고, 정작 핸드폰을 들었을 땐 마땅한 전화번호하나 떠오르지 않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독신선언으로 봉수의 마음에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절친한 친구마저 갑작스러운 결혼발표로 봉수의 뒤통수를 때려대니… 그의 심정은 꼭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남자관객뿐 아니라 많은 여자분들도 백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죠.

그렇게나 슬픈 비가 오던 날, 손에 꼭 쥔 ‘엄마는 죽지 않았다’의 나뭇잎을 아프게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날부터 봉수군의 삶은 항상 아프고 쓸쓸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원하는 사랑은 항시 목마른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스스로에게 사랑에 빠지는 마법이라도 걸고싶음 때문인지 봉수군은 기기묘묘한 마술을 부려댑니다. 2년 후 혹은 3년 후 기쁘게 그의 마술을 지켜볼 그의 아내에게 바치는 그의 작은 마술쇼이건만 안타깝게도 항상 공허하게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비어있는 그의 삶에 허전함만을 가중시킬 뿐이었죠. 눈 깜빡 할 새에 동전을 사라지게 하고, 찢어진 종이를 말끔하게 펴내는 그의 여유로운 미소는 '불후의 명작’에서 박중훈의 자아가 투영됐던 볼품없는 삐에로가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헤벌죽 웃는 그 미소만큼이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삶의 아이러니는 이런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필요하다는 절실한 외로움에 몸을 떨 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따뜻한 손을 내밀고 있을 그 누군가가 있을 만도 한데, 정작 그 외로움에 혼자 도취되어 스스로 귀머거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누군가를 향해 끝없이 갈구하는 자신의 모습 뒤에 자신의 모습과 똑 닮게 나를 바라보는 그 혹은 그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 화면에 자신을 담는 그들의 애닯은 사랑은 독백 속에 쓰디쓰지만, 결국 그게 서로의 눈에 들어왔을 땐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듯이 말입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폐쇄회로 화면에서 원주가 불러대는 ‘봉수씨!’를 보며 그는 과연 자신의 서글픔과 외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걸작영화의 주인공처럼 외로움도 슬픔도 멋들어지게 감수할만한 그런 강철심장을 가지고 있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의 곳곳에 박혀있는 퉁명스런 봉수군의 표정과 어색하기만 한 그의 소심함에 웃음의 고리들을 찾아갈 수 있을 듯 보입니다. 설경구의 연기에 가려 많이 퇴색해 보이긴 하지만, 당차게 짝사랑을 이루어가려는 원주의 역을 무난히 연기해낸 전도연 역시 그 캐릭터의 고집만큼이나 꿋꿋하게 삶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우리에게 미소를 줍니다. 세상살이의 그 모든 걱정과 사랑과 의지와 신념들도 썩어 없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그 처절한 존재의 가벼움을 밀란 쿤테라는 참으로 단호하게 역설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는 ‘그 남자다, 그 사람이다, 그 남자다, 그 사람이다..’처럼 행복이 보장된 결과를 기다리는 그런 따뜻함이 분명 나에게도 허락될 장미빛 인생을 꿈꾸고 싶어졌습니다. 조용히 자신에게 주술을 걸듯이 말입니다. ‘내가 만날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근사한 남자다, 좋은 사람이다… 아니면 근사한 남자다…’

Scangirl은 항상 좋은 소식만 전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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