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가상의 일본

정부는 극심한 사회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급진적인 경제정책을 펴 결실을 맺는 한편, 도심으로 몰려들어 슬램을 이룬 수많은 실업자들의 흉폭한 범죄와 무장투쟁을 선동하는 반정부세력에 대한 무력진압을 감행하였다.

저주 받은 야수성의 상징
인간전투병기

자치경찰이 치안의 한계를 보이게 되자, 정부는 수도권에 한정한 수도경을 창설 반정부세력을 무력진압을 시킨다. 수도경의 핵심인 특기대의 최정예대원 ‘후세 카즈키’. 그는 반정부세력이 지하구내를 이용하여 폭발물을 운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되었다가 ‘빨간두건단’의 일원인 한 소녀를 사살하지 않고 자폭광경을 목격한다.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던 후세는 우연히 죽은 소녀의 언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국가공안부의 거대한 음모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에게 총구를 겨눈다.

버림 받은 서글픈 영혼
반정부세력 빨간두건단

무력충돌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높아지자, 수도경에 위협받고 있던 자치경찰과 특기대의 지나친 폭력성으로 인해 공안활동의 무기력을 우려한 공안부 요인들은 공안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치안태세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특기대의 고립을 꾀한다. 반정부세력 빨간두건단 출신 테러리스트 아마미아 케이는 국가공안부에 체포된 후 그들의 사주를 받아 계획적으로 후세에게 접근하지만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는 이제 사랑하는 이를 거대한 음모의 희생양으로 바쳐야만 한다.

재패니메이션의 최고봉
다시 없을 세기의 걸작!

마이니치신문은 '실사영화로는 재현 불가능한 시대를 무대로, 또 하나의 전후사를 대담하고도 모험적으로 그려낸 <인랑>은 애니메이션사의 하나의 사건'이며 '압도적인 화면과 구성력, 아니메 특유의 카타르시스는 재패니메이션의 최고봉'이라고 칭송하며 제54회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애니메이션상을 안겼고 포르투갈국제영화제 최우수애니메이션상과 심사위원특별대상을 비롯하여 베를린영화제 등 수많은 국제영화제에서 극찬 받았다. 또한 오시이 마모루를 존경한다고 공언해 온, <바운드>와 <매트릭스>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는 <인랑>을 '실로 놀랍고 멋진 작품이며 총격전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일본에서 개봉되기도 전에 애니메이션의 불모지라 불리울만큼 까다롭기로 유명한 프랑스에 먼저 입성한 <인랑>은 개봉과 동시에 흥행 1위로 등극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프랑스의 유력일간지 [르 몽드]는 '혼돈스러운 세상 속에서 휴머니스트를 선언한 대작'이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진정한 미를 발견하게 한다'고 극찬하였다. 제작 1년 반 여 만인 지난 6월, 글로벌 프로젝트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인랑>이 일본에서 개봉되자 일본 국민은 신주쿠 시어터 등 상영횟수를 늘린 개봉관의 계단까지 가득 메우며 이 세기의 걸작을 환대했다.

빨간 두건의 동화
그 충격적 메타포

인간의 감성을 거세 당하고 오직 동물적 본능만을 지닌 채, 인간살인병기라는 부조리한 존재의 이유로 생존하는 인간늑대 후세는 그 존재 이유였던 특유의 야수성으로 인해 고립 당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에 총구를 겨눠야 하는 비정한 운명의 사나이다. 또한 고독한 여인 아마미아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평화로운 행복을 갈구하지만 행복이라 믿었던 사람의 손에 의해 처참히 죽어가야 한다. 후세의 케르베로스로서의 숙명은 바로 인간 세상과 격리된 채 야수의 습성만을 갖고 살아가는 빨간 두건의 동화 속 늑대의 모습이며, 믿었던 사랑에 배신 당한 채 죽어가야 하는 아마미아는 마치, 벗어내기 힘든 철갑 옷을 벽에 문질러가며 어머니를 만나기를 소원하지만 결국 야수의 사냥감이 되어버리는 여자아이의 모습과 같다. 그림형제의 동화를 원용하여 여주인공 아마미아의 나레이션으로 전달되는 ‘빨간 두건’이라는 모티브는, 이들의 안타까운 운명을 효과적으로 암시하며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공각기동대> 제작팀의 또 다른 신화

<인랑>(99)은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철학자 오시이 마모루의 실사영화인 <붉은 안경>(86), <케르베로스 –지옥의 파수견>(91)의 뒤를 잇는 케르베로스 3부작 중 세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세계에 동시개봉 되면서 재패니메이션의 절정을 보여주었던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사단이 80억원이 넘는 제작비와 제작기간 3년, 1천여명의 인력을 투입해 만든 초특급 프로젝트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격찬을 받은 <인랑>.
원작과 각본, 기획을 담당한 오시이는 <아키라>의 원화와 <공각기동대>의 캐릭터디자인 및 작화감독을 훌륭히 소화하며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차세대 주자로 떠오른 오키우라 히로유키에게 감독을 맡겼다. 여기에 오시이 사단의 핵심멤버인 미술감독 오구라 히로마사를 비롯해 미술설정 와타베 다케시, 제작의 이시가와 미츄이사와 더불어, '싸우지 않는 군대'라는 닉네임에 걸맞는 탄탄한 조직을 자랑하는 반다이 비쥬얼과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1, 2편 및 <공각기동대>를 제작한 일본 굴지의 프로덕션 IG가 가세하여 디지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능가하는 아날로그 애니메이션의 신화를 탄생시켰다.

실사영화를 능가하는 진한 감동으로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새로운 테마와 기술을 개발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는 오시이와 오키우라는 놀랍게도 CG에 잠식당하고 있는 셀애니메이션을 활용해 실사영화를 능가하는 벅찬 감동을 이끌어냈다. 애니메이션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인 세팅을 위해 작품의 분위기에 가장 어울리는 도시를 찾아 다니기도 하고 총알이 벽에 박히거나 건물을 부수는 경우 실험과 실사촬영을 거치는 한편, 같은 레이블의 제품일지라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아주 미세하게 변색해 가는 물감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상당량을 폐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인랑>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부드러운 손짓이나 맞잡은 손의 떨림 등으로 진한 감동을 이끌어내며 디지털의 화려함과 실사영화의 리얼리티를 뛰어넘는 최고의 작품성을 과시함으로써 애니메이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