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사라 모튼은 영국인 추리 작가입니다.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도웰이라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 사람의 시리즈물은 신본격파 미스터리인 모양이에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요새 이 장르는 거의 여성 작가들의 전문이 된 것 같지 않나요? 루스 랜들이니 P.D. 제임스니 하는 이 장르의 대표 작가들은 모두 여자들이잖아요.

하여간 영화가 시작되면 사라는 잔뜩 지쳐있는 중입니다. 도웰 시리즈는 잘 풀리지 않고 요새 왜 이런 일을 하나... 하는 회의감도 들죠. 주변을 둘러보면 자기 책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할 일 없는 할머니들 같으니 짜증이 하늘을 찌르고요. 자기도 이제 문학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할머니가 되어가는 걸까요?

숨통이 막혀가는 사라에게 출판사 사장인 존 보슬로드는 프랑스에 있는 자기 별장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사라는 새 도웰 시리즈의 아이디어를 들고 프랑스로 건너가지요. 평온한 환경에 만족한 사라는 슬슬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하지만 사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갑자기 존의 프랑스인 사생아 쥘리가 짠하고 별장에 나타났거든요. 사라는 처음엔 쥘리와의 불편한 동거에 짜증을 내지만 그러면서도 점점 그녀에게 매료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결국 사라는 쓰고 있던 도웰 소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쥘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스위밍 풀]의 스토리 전개는 루스 랜들이 바바라 바인 필명으로 썼을 법한 범죄소설의 줄거리 같습니다. 아마 오종 역시 그걸 의도했을 거예요. 하긴 프랑스 영화계는 수십 년 동안 영미권 추리작가들의 작품들을 훔쳐왔으니, 오종이 이런다고 특별히 예외적이라고 할 건 못되지만요.

프랑소아 오종의 이전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이 작품은 [바다를 보라]와 [사랑의 추억] 사이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를 보라]처럼 해변의 별장을 무대로 두 여인의 갈등을 그리고 있고, [사랑의 추억]처럼 샤를로트 램플링을 주연으로 내세운 초현실적인 이상심리극이니까요. 다시 말해 그렇게 새로운 시도는 아니라는 거죠. 그의 첫 영어 영화라는 걸 잊는다면 말이지만요.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결말입니다. 지금까지 전형적인 영국 추리소설처럼 흘러가던 이야기가 막판의 반전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돌진하니까요. 영화 후반부에서 쥘리를 주인공으로 한 [스위밍 풀]이라는 소설을 완성한 사라는 이미 다른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그 소설을 존에게 보여줍니다. 존의 신경을 긁는데 성공한 사라는 의기양양해져 존의 사무실을 떠나는데, 바로 그 순간 존의 딸인 '줄리아'와 마주칩니다. 자기를 전혀 몰라보는 줄리아를 잠시 바라보던 사라는 곧 그 자리를 떠나고 장면은 다시 프랑스의 별장으로 옮겨집니다. 별장 이층에서 사라는 수영장의 쥘리를 내려다보는데, 쥘리는 곧 줄리아로 얼굴이 바뀌지요.

이 다소 혼란스러운 결말 덕택에 관객들은 지금까지 진행된 이야기의 진위성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가장 분명한 해석은 우리가 지금까지 본 모든 것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라가 프랑스에서 쓴 소설의 내용이라는 것이죠. 오종이 몇몇 구체적인 힌트를 흘리고 있기 때문에 우린 여기에 대해 꽤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설의 어디까지가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까요? 쥘리는 정말 실재했던 인물일까요? 살인은요? 그리고 픽션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누가 알겠어요. 사라는 존이 자기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이 모든 이야기들을 상상해 썼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라는 쥘리와 비슷한 어떤 인물을 만나 영감을 얻은 뒤 이야기를 썼을 수도 있습니다. 후반부에 언급되는 쥘리의 엄마는 존의 요구대로 추리소설에 안주한 풋내기 작가 시절의 자신일 지도 모릅니다. 사라가 쥘리 엄마의 소설을 '표절'하는 건 자신의 원래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일 수도 있죠. 쥘리의 배에 난 상처는 교통사고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제왕절개에 의한 것일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건 사라의 이전 경력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쥘리도 사라의 다른 모습이라고 우길 수도 있고요.

어느 게 오종의 의도이건, 영화는 이 결말에 의해 갑작스럽게 풍요로워집니다. 아뇨, 이 영화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풍성한 영화적 꿈은 아닙니다. 내용 자체만 따진다면 건조하고 다소 평면적이지요. 이 영화에서 진짜로 재미있는 건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이 해석자인 관객들에게 부여하는 자유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평론이나 비평이 영화 자체보다 더 흥미진진할 수도 있어요. 물론 평론가가 오종의 게임에 응했다면 말이지만요.

여러분은 오종이 [스위밍 풀]에서 조금 게을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오종은 평론가들에게 텍스트를 가지고 바쁘게 뛸 기회를 제공해준 뒤 익숙한 자리에 앉아 한가하게 휴가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때문이겠죠.

두 주연배우 샤를로트 램플링과 뤼디빈 사니에는 모두 오종의 이전 영화들에 출연한 적 있는 배우들이니 이들의 캐스팅도 게으른 선택이랄 수 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오종보다 더 심각하게 영화에 임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고 섹시한 램플링과 그녀의 영국적인 날카로움을 거의 프랑스다운 자유분방함으로 응수하는 사니에는 모두 근사하고, 팽팽한 성적 긴장감으로 가득 찬 둘의 앙상블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습니다.

기타등등

사니에가 영어 대사를 읊는 걸 듣노라니 점점 이 사람이 팅커벨을 연기한 P J 호건의 [피터 팬] 영화가 궁금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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