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커닝햄은 99년도 퓰리처상 수상작인 그의 소설 [The Hours(우리나라에서는 [세월]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텍스트로 삼아 흥미로운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따로 떨어진 세계를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들의 하루를 번갈아가면서 보여주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의 무대는 1923년 리치몬드입니다. 주인공 버지니아 울프는 이날 드디어 [댈러웨이 부인]의 구상에 들어갑니다. 두번째 이야기의 무대는 1949년(영화에서는 51년으로 옮겨졌습니다)의 로스앤젤레스. 주인공인 가정주부인 로라 브라운은 남편의 생일 케익을 준비하는 동안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조금씩 읽어나갑니다. 세번째 이야기의 무대는 20세기 후반(영화에서는 2001년으로 옮겨졌습니다)의 뉴욕. 주인공 클라리사 본은 에이즈로 죽어가는 옛 애인인 리처드를 위해 파티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커닝햄은 [디 아워스]를 통해 작가(버지니아 울프), 독자(로라 브라운), 극중인물(클라리사 본)의 관계를 교묘하게 엮어 흥미로운 텍스트의 미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적당한 날을 하나 잡아, 울프의 삶을 압축시켜 그 안에 담아낸 뒤, 울프의 삶과 [댈러웨이 부인] 사이의 연관성을 잡아냅니다. 그러는 동안 독자인 로라 브라운은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사방이 막혀 있는 결혼 생활의 갑갑함과 고통을 [댈러웨이 부인]에 투영해내고요. 또 그러는 동안 여러 모로 현대판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리사 본은 이상할 정도로 [댈러웨이 부인]의 캐릭터들과 닮은 사람들 사이에서 소설과 아주 비슷한 하루를 경험합니다.

이 과정은 마치 입체파 화가의 작업과 같습니다. 커닝햄은 작가의 생애를 통해 소설의 기원을 추적하고, 독자를 통해 보편성을 확인하고, 자기가 만든 도플갱어들을 통해 소설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뒤 그들을 또다시 부수어 하나의 그림 안에 끼워맞춥니다. 독자들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세 가지 이상의 다른 각도에서 동시접근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런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커닝햄의 소설은 시작부터 문학적 게임입니다. 만약 공들여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흉내내는 그의 어투가 날아가버린다면, 작품의 핵심도 한꺼번에 날아가버리는 게 아닐까요?

글쎄요. 질문의 대답은 무엇을 작품의 핵심으로 보느냐에 다릅니다. 데이빗 헤어의 각본은 커닝햄의 문학적인 언어를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살려내지는 않습니다. 장르가 바뀌면서 그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댈러웨이 부인]과 [세월]의 중요 주제인 시간, 죽음, 삶, 양성애, 자살과 같은 모티브는 버려지지 않고 새로운 장르에 맞게 다시 변형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텍스트는 또다시 해체되어 재구성됩니다 (아마 심심한 비평가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재구성한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이 데이빗 헤어의 각본을 거쳐 스티븐 달드리의 연출로 영화화되는 동안 만들어진 긴 사슬을 추적하며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겁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개별 장들에 의해 격리된 소설과는 달리, 세 인물들과 시간선들은 훨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접착제처럼 연결시키는 필립 글래스의 음악 (많은 부분에서 기존곡들이 재사용되었지만요) 역시 이런 영화에서는 이상적인 선택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매정한 흐름을 묘사하는 데 글래스만큼 적절한 작곡가가 있을까요? 전체적으로 헤어와 달드리는 이 영화를 마치 버지니아 울프와 마이클 커닝햄의 주제를 사용한 푸가처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려한 흐름은 종종 나름대로 무언의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무언가를 창조해내기까지 합니다. 아마 연극으로는 이런 것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소설이 가진 복잡성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일부는 시간 제한 때문이기도 하고, 일부는 헤어와 달드리의 선택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주제는 원작보다 노골적이며 감정은 종종 선을 넘어섭니다. 아마 몇몇 관객들은 필요 이상으로 멜로드라마틱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커닝햄의 소설에 녹아있는 게이 남성의 감수성을 고려해보면 이런 디바 풍의 과장은 원작을 그렇게까지 거스르는 건 아닐 겁니다.

소설이 영화 각본으로 넘어가면서 어느 정도 잃어버린 캐릭터의 선명성은 배우들에 의해 보완됩니다.

우선 니콜 키드만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는 원작보다 훨씬 강렬합니다. 키드먼은 울프의 신경 쇠약, 절망감, 폐소공포증, 불안함을 에칭과도 같은 날카로움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늘 필요한 것보다 아주 약간 오버하는 경향이 있는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경향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어요. 특수 분장으로 그 사람의 화려한 외모를 억누른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줄리안 무어는 억압된 50년대 가정주부인 로라 브라운을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장엄하게 그려냅니다. 무어의 연기는 싸구려 장난감 진열장과도 같은 50년대 로스앤젤레스 교외 배경과 대조되어 아이러니컬한 엄숙성을 부여받습니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굉장히 스트립적입니다. 물론 좋은 의미로요. 스트립이 아무리 연기폭이 넓은 배우라고 해도 이 사람이 가장 잘하는 영역이 존재하는데 클라리사 본은 바로 그런 영역에 속해있습니다. 풍부한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노출시키며 조금씩 절정으로 끌어가는 캐릭터 말이죠.

이들 주변엔 에드 해리스, 클레어 데인즈, 토니 콜레트, 앨리슨 재니, 미란다 리차드슨, 존 C. 라일리와 같은 배우들이 포진해있습니다. 이들의 앙상블은 모두 굉장히 좋은 편이라,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디 아워스]는 이번 시즌 오스카 용 할리우드 영화이고 (사실은 저번 시즌에 개봉되어야 했지만 후반 작업이 늦어져서 이번 시즌으로 연기되었답니다,) 이런 영화들이 종종 그렇듯 노골적인 스노비즘을 바탕에 깔고 있기도 합니다. [댈러웨이 부인]과 울프의 삶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영화의 많은 부분을 놓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영화 자체는 여전히 흥미로운 실험이고 배우들의 질은 훌륭하며 스티븐 달드리는 전작을 능가하는 통제력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양질의 상품을 받아놓고 제가 불평을 늘어놓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을까요?

기타등등

1. 커닝햄의 원작 소설에서 클라리사는 꽃을 사러 나갔다가 영화 촬영 장소를 지나칩니다 ([댈러웨이 부인]의 비행기 광고에 해당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죠.) 클라리사는 거기서 메릴 스트립이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로 추정되는 어떤 배우를 슬쩍 보게 됩니다. 만약 그 배우가 정말로 메릴 스트립이었다면, 영화는 의도하지 않은 또다른 순환 고리를 만든 셈이겠지요.

2. 꽃집 주인 바바라 역을 한 배우는 에일린 앳킨스입니다. 이 사람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주연의 [댈러웨이 부인]을 각색한 적도 있으니까 아주 의미있는 카메오였던 셈이죠.

3. 니콜 키드먼이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하기 위해 공들여 특수 분장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란다 리처드슨은 그런 식의 분장을 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스티븐 자매들은 모두 상당히 닮은 사람이었단 말이에요. 하긴 그래서 둘의 키스신에 근친상간적인 느낌이 덜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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