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이 되는 건 길뿐이었습니다. 난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어느 새 낯선 곳에 도착합니다. 그러면 이내 불안해집니다. 아는 길을 찾아 헤매게 되죠. 그리고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 나올 때쯤에서야 안심합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내가 헤매던 길들은 내가 찾던 길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은 익숙한 길로 돌아온 후에야 깨닫곤 했죠.

세 여자가 있습니다. 1923년, 리치몬드에서 살아가는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LA에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에서 살고 있는 댈러웨이 부인 클래리사가 그들입니다. 새털같이 많은 날 중의 어느 하루, 영화 <디 아워스>는 이 하루에 주목합니다.

이 날은 모두에게 파티가 있는 날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에겐 런던에서 언니가 오기로 했고, 로라에겐 사랑하는 남편의 생일이 있고, 클래리사에겐 옛애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가 있죠. 이 하루를 살아가는, 혹은 버텨가는 세 여자의 일과가 교차편집 되면서 영화는 이어집니다. 그녀들은 하루동안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기도 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탈출을 꿈꾸기도 합니다. <디 아워스>는 이들의 하루를 통해 그녀들이 지닌 삶에 대한 고민과 혼란, 정체성, 모든 것들이 녹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관객이 이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면을 읽어낸다는 건, 그 내면을 그려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우니까요.

이 영화를 보고 '도대체 그녀들의 문제가 뭐야?' 라고 묻는다면 이미 게임에서 진 겁니다. 외견상 그녀들은 문제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집과 다정한 이웃까지. 부족할 게 없으니까요. 영화는 보다 내면적이고 추상적입니다. <디 아워스>는 실제로 버지니아 울프 소설의 느낌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소설이 경험에 기반한 사실에 초점을 맞춰서 사건 위주의 이야기를 묘사했다면, 버지니아의 소설은 사람의 마음이나 침묵과 대화 사이, 그리고 내면의 묘사와 같은 '의식의 흐름' 을 표현했습니다. 이런 기법을 '신심리주의'라고 하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화 역시 이를 반영해서 주인공들의 의식의 흐름을 촘촘히 따라갑니다. 니콜 키드만이나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연기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는 사건이 아닌, 사람의 내면에 주목하고 있으니까요.

<디 아워스>는 꼭꼭 씹지 않으면 그 맛을 알 수 없는 유태인들의 베이글 빵 같습니다. 2천년전부터 유태인의 식탁에 올려졌다는 이 빵은 미국 동부지방으로 이민을 간 유태인들에 의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빵보다 당분과 지방의 사용이 적어 맛이 아주 담백하지만 겉은 딱딱하고 별다른 풍미가 없어서 처음 먹는 사람은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빵은 씹으면 씹을수록 쫄깃한 맛이 그만입니다. <디 아워스> 역시 2천년의 세월을 지닌 베이글 같은 영화입니다. 천천히 잘 씹지 않는다면 숨겨진 그 맛을 결코 알 수 없으니까요.

길을 찾아서 헤매던 날의 기억들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기차역 플랫폼에 앉아있던 버지니아처럼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때. 하지만 내가 서 있던 건 언제나 플랫폼, 그 자리였습니다. 정작 떠나지 못했던 건, 모든 문제의 원인도 해결방법도 내 속에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그 어느 곳에 간다해도, 그리고 다시 수많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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