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 무간된 신분(無間된 身分)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우리가 몸담은 그 세월이 쉽게 바뀔 줄 알았어? 그 세월 동안 우리는 지옥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무간지옥>에 살고 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지. 우리? 그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어 있었던 거야.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었지. 3년이면 된다더니, 3년이 지나면 또 3년, 그 3년 뒤에 또 3년…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좋은 사람이 되건 나쁜 사람이 되건, 자유로운 시민이 될 권리조차 우리에겐 주어지지 않았어. 이제, 선택하고 싶어 선택하려 했는데… 이젠, 우리가 우리가 될 수 없더군. 우리의 지옥은 너무도 길고 고통스러워서, 하늘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나 봐. 이젠, 우리는 너와 나. 따로따로 갈 길을 가야 하지.

영화 <무간도>는 그런 영화다. 조직에 잠입한 스파이 진영인과 경찰에 잠입한 스파이 유건명이 동심일체가 되어 슬프디 슬픈 느와르를 만들어내는 영화.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아직은 훈련병인 시절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기본 줄거리가 된다. '삼합회'를 타도하기 위해 잠입시킨 스파이 영인과 경찰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마약거래를 무사히 마치려는 '삼합회'측의 스파이 건명은 서로의 보스에게 신뢰를 톡톡히 받으며 자신들이 스파이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각자의 위치에서 명활약을 펼친다. 영화의 줄거리상으로 보면, 건명이 조금 더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그가 경찰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터이다.
진영인이 경찰스파이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경찰인 황국장이 '삼합회'측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영화는 또다른 반전을 준비한다. 그리고, 느와르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액션 - 사실, 이 영화에서의 액션은 그다지 액션답지 않다. 그저, 구슬픈 울부짖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둡지 않은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느와르니까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것이다. - 을 발휘하면서 영화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슬픔(?)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10년 동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나의 가치존재조차 무가치하게 될 때, 어쩌면 그것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보다 더한 형벌일 것이다. 진영인과 유건명의 합작은 그래서 더욱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들은 '합작'을 통해서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자칫 무가치하고 무의미할 수 있는 존재를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으로 환원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한 사람이 빛나게 되는 결말 자체가 주는 힘은 그리 커보이지 않고,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슴 속에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한편의 슬픈 영화. 이 영화는 그런 슬픈 느와르의 범주에 분명히 속해 있어, 해볼만한 싸움(나는 느와르를 '감상'할 때 '감상' 대신 '싸움'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이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다.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다. 원하는 신분을 얻을 수 없는 삶. 비록 삶과 죽음의 명암이 엇갈렸지만, 원래 그들의 신분을 찾은 것은 아니기에 아직까지도 무간의 고통은 끝이 나지 않은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