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페인의 신작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 워렌 슈미트는 지금까지 평생을 일해온 보험회사에서 막 퇴직한 60대의 평범한 노인입니다. 그럭저럭 자기에게 존재 이유를 마련해주었던 직장에서 밀려나고 지금까지 여벌의 살덩이처럼 붙어 있던 아내가 갑자기 죽자 그는 끔찍한 심리적 공황에 빠집니다. 그나마 그에게 삶의 목적을 제공해주는 건 멍청한 물침대 세일즈맨과 결혼하려는 딸을 구출하겠다는 의무감뿐이죠.

워렌 슈미트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루이스 비글리의 창조물입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페인의 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가 비글리가 만들어낸 그대로라고는 생각하지 마시길. 전 원작은 읽지 않았지만 책의 리뷰는 몇 개 읽었습니다. 비글리의 슈미트는 약간 반유태주의 끼가 흐르는 은퇴한 WASP 변호사이고 딸은 유태인 변호사와 결혼하려는 여피 변호사라는군요.

그렇다면 페인은 소설에서 기본 골격만 가져와 자기만의 슈미트를 재창조한 셈입니다. 하긴 영화를 봐도 그런 느낌이 눈에 들어와요. 영화는 그의 전작인 [일렉션]처럼 페인의 고향인 오마하에서 시작하고, [일렉션]만큼이나 페인의 냉정한 개성이 강하게 묻어 있습니다. (그걸 고려해보면 [일렉션]도 원작과 영화의 차이가 상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비글리가 슈미트를 심술궂고 편견에 찬 WASP 영감탱이의 대표로 그렸다면, 페인은 자신의 슈미트를 사회적으로 훨씬 아래에 내려놓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하지도 않고 편견과 학대의 희생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무언가 이루었다고 생각할만큼 부유하지도 않고 앞으로 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몇 십년 동안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쫓겨난 퇴물에 불과하죠. 한마디로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바웃 슈미트]는 이 아무 것도 아닌 남자가 무언가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과정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산 위네바고로 미국 여행을 떠나고 (이 부분은 어딘지 모르게 그의 초기작인 [이지 라이더]를 [스트레이트 스토리]에 버무려낸 듯 합니다) 딸을 막으려고 어설프게 시도도 해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룩해내지 못합니다. 그나마 그가 매달 22달러씩 지원해주며 양부 행세를 하는 탄자니아 소년 엔두구만이 그에게 존재 가치 비슷한 것을 부여해줄뿐입니다.

페인은 슈미트의 처절한 여행을 미국 중산층의 따분한 세계를 묘사하는 도구로 이용합니다. 페인의 묘사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흥미로운데, 그건 그가 일반 미국인들을 둘러싼 이 콘크리트 세계의 진부함과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페인의 통찰력은 그의 캐스팅 능력이나 완벽한 로케이션 장소를 찾아내는 능력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바웃 슈미트]의 세계는 잔인할 정도로 평범합니다.

거의 절망적이기까지 한 비극이지만, [어바웃 슈미트]는 여전히 코미디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주 효율적인 코미디지요. 페인은 강한 자조의 느낌으로 캐릭터를 다루고 있는데, 덕택에 웃음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이야기의 비극성이 더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페인의 코미디는 건조하지만 차갑지는 않습니다.

잭 니콜슨의 기용도 이중적입니다. 슈미트라는 인물의 설정은 니콜슨이 지금까지 연기한 컬러풀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환경이 니콜슨이라는 배우의 바로크적인 거창함과 결합하면 결과는 놀랍습니다. 니콜슨은 새로운 연기 근육을 실험할 수 있고 영화와 캐릭터는 뜻밖의 에너지를 얻는 거죠.

다른 배우들도 캐스팅이 굉장히 좋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장래 사돈을 연기한 캐시 베이츠의 염치없으면서도 늠름한 모습이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건 전체적인 캐스팅의 느낌입니다. 적절한 이미지의 직업 배우들과 동네 무명 배우들을 적당하게 결합한 [어바웃 슈미트]의 이미지는 종종 할리우드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넘칩니다.

[어바웃 슈미트]는 코미디가 현대의 비극을 묘사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멋진 사례입니다. 현대 사회를 사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진정한 비극은 옛 시인들이 묘사했던 거창한 고통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의미를 잃고 어릿광대로 떨어지는 우리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대면하는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타등등

분장 때문인 것도 알고 캐릭터 때문인 것도 아는데, "더못 멀로니가 언제부터 저렇게 상한 거지?"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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