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춘추전국시대입니다. 3년전 진시황은 궁궐에 침입한 두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뻔한적이 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진시황은 목숨을 위협했던 파검(양조위)과 비설(장만옥)에게 수배령을 내리고 궁궐내에서도 누구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백보 금지령'을 내립니다. 신변에 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진시황에게 무명(이연걸)이란 검객이 찾아오는데 뜻밖에도 그가 가지고 온 상자엔 파검과 비설의 검이 들어 있습니다. 무명은 진시황에게 그들을 죽인 사연을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1. 황제보다는 호위 무사

황제 장 이모우가 견고하게 쌓아올린 <영웅>이라는 궁궐은 호위 무사들의 명성 때문에 천하를 호령할 만합니다. 각각 <와호장룡>의 제작과 음악을 맡았던 빌 콩과 탄 둔을 시작으로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 중국 최고의 무술 감독 정소동(전 원화평보단 이 사람을 쳐준답니다. ^^), 여기에 양조위, 장만옥, 이연걸, 장쯔이, 견자단, 진도명까지... 이 정도면 천하의 주목을 독차지해도 손색이 없는 진용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아낌없는 관심을 응당 보상해 줄 수있는 영화의 완성도입니다. 대중들은 너무나 냉정해서 기대치 이상의 것을 보상받지 못하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장예모의 <영웅>은 크게 판을 벌인 것만큼 크게 보답해야 합니다.

여기에 한가지가 더 있군요. <영웅> 이전까지 강호의 최고수였던 <와호장룡>의 존재입니다. 무협 액션 부분에서 이미 <와호장룡>은 객관적인 성공을 이룩했고 후발주자인 <영웅>은 운명적으로 끊임없는 비교와 질타를 받으며 레이스를 견뎌 내야 합니다. <와호장룡> 이상의 것을 보여줘야 하며 뭔가 다른 독자적인 영역도 개척해야 하는 것이죠.

2. 색감과 감성의 무협

<영웅>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 명쾌합니다. 무명이라는 검객이 절대 고수 파검, 비설을 죽이고 그들의 검을 진시황에게 바칠 수 있었던 경위를 몇 가지 관점에서 반복하죠. 무명이 진시황에게 주장하는 이야기와, 사실을 믿지 못하는 진시황이 추측하는 관점, 여기에 실제 일어난 진실까지. 인물과 장소는 동일하고, 파검과 비설이 죽었다는 결론도 고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의 차이에 따라서 행동과 인물의 의도가 달라집니다. 장 이모우 감독은 이 미묘한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차별되는 색감을 사용했습니다. <홍등>과 <붉은 수수밭>의 전적처럼 포인트 몇군데에 색감을 주는 게 아니라 영화 자체를 아예 하나의 색상으로 통일시켜 버립니다. 이런 화려한 색감의 활용은 무색무취의 <와호장룡>과 스타일 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영웅>은 <와호장룡>과 달리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영웅>에는 양자경과 주윤발의 감쳐진 관계처럼 관객에게조차 감정의 표현을 숨기려는 캐릭터가 없습니다. 파검과 비설은 진시황을 죽이려는 대업 때문에 관계를 맺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이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들이 겪는 감정의 깊이는 친절하게 관객에게 전달되고 <영웅>이 가진 정서의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와호장룡>이 무딘 감정으로 무협을 다가갔다면 <영웅>은 보다 인간적인 정서에 호소합니다.

3. <와호장룡>을 굴복시키다

<영웅>에게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와호장룡>이 구사한 '협(俠)'의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적인 재미를 견지하는 자세입니다. 장 이모우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금강경 한 구절'이나 설파하면 그만일 영화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오락 영화의 쾌감을 위해 시각적인 볼거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차별된 색상의 배치들이나 대규모 군중 동원 장면들. 적절한 C. G가 가미된 화려한 무협 장면들은 활동적인 무협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합니다. 이와 동시에 비파 소리를 배경으로 명상을 하며 대결을 하는 두 자객의 결투 장면처럼 '협(俠)'적인 액션을 구현합니다.

<영웅>이 <와호장룡>보다 고상한 정신세계를 구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영웅이 추구하는 세계는 개인의 애정 문제처럼 훨씬 속세 냄새를 풍깁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와호장룡>보다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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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에서 장만옥과 장쯔이가 대치하는 첫 장면. 애처로울 정도로 당하는 장쯔이를 보면 <영웅>이 <와호장룡>에게 정면으로 보내는 도전장처럼 느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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