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장 이모우의 [영웅]은 대작을 위장한 소품입니다. 진나라 시대의 배경, 국왕 암살 음모라는 소재, 어마어마한 세트를 꽉 채운 엑스트라들과 같은 걸 보면, 이 영화가 꼭 굉장한 스케일의 영화같습니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하는 이야기는 아주 작고 조촐하기까지 해요. 결국 이 영화의 내용은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이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니까요.

[영웅]은 무명이라는 무사가 지금까지 진왕인 영정을 암살하려고 했던 세 명의 자객인 장천, 파검, 비설을 자기가 어떻게 제압했는지 영정에게 이야기하면서 시작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라쇼몽]을 연상하던데, 구조는 비슷하지만 아주 같지는 않습니다. 진실을 구별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나열되는 [라쇼몽]과는 달리, [영웅]의 이야기는 양파 같습니다.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일수록 진실에 가깝고, 마지막 이야기는 그냥 진실이지요.

보다 자세하게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명은 자신이 어떻게 자객들을 처치했는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무명이 자신에게 접근하게 위해 거짓말을 하는 자객이라고 생각한 영정은 실제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무명은 영정의 추측을 인정하고 거기에 모자란 부분을 보충한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건 실제 사건과 연결됩니다. 무명의 이야기 중간엔 파검이 영정을 암살하려고 했던 3년전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고요.

영화는 이 각각의 이야기를 구별하기 위해 노골적일 정도로 분명한 색조 대비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무명의 첫번째 이야기는 빨강색입니다. 영정의 이야기는 푸른색이고요. 무명의 두번째 이야기는 흰색조이고, 파검의 이야기는 초록색입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이 이야기되는 영정의 왕궁은 검정색입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가 노리는 건 다양한 원색의 색조들로 만들어내는 분위기의 변화인 것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의 각본은 그렇게까지 공감가는 편이 아닙니다. 조금씩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나열해가며 진상에 접근하는 서술기법은 분명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영화 전체가 지나칠 정도로 그 형식에 얽매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런 형식은 개별 에피소드들의 힘을 빼앗기도 합니다. 탐미적인 사각 관계 연애담이었던 첫번째 이야기는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이야기의 힘은 떨어져 버리죠. 게다가 뒤에 이어지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은 첫번째 이야기와 대조되어 거의 교과서적인 밋밋함을 풍기게 됩니다.

더 문제가 되는 건 후반부로 접어드는 동안에도 주인공들에게 특별히 대단한 깊이가 더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파검이 왜 영정을 암살하지 않으려 했는지 알게 됩니다. 왜 파검과 비설의 관계가 차가워졌는지도요. 하지만 우리가 그 캐릭터들을 인간으로서 더 잘 알게 되었는가? 글쎄요. 그들은 여전히 살아숨쉬는 캐릭터보다는 중국의 옛 열전들에 짧게 언급되는 충신들의 프로필 같습니다. 이야기의 주제가 전체주의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것도 거북스럽고요. 아마 이 영화는 중국 검열 기관을 아무런 무리없이 통과했을 겁니다.

핵심 내용보다는 부분들이 오히려 더 좋습니다. 원색의 위태로운 경계를 넘나드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은 종종 유혹적일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배우들은 모두 각본에 쓰여진 것 이상을 연기하고 있고요. 가끔 특수 효과가 필요 이상으로 쓰였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들이 교류하는 무술 장면들은 인상적이었고, 이 모든 것들을 꾸미는 중국식 허세 역시 즐거웠습니다.

[영웅]은 여전히 흥미로운 영화입니다만, 진짜 강한 인상을 남길만한 무언가가 조금 부족합니다. 재미있는 형식에 발목을 잡힌 또다른 희생자가 아닌가 생각해요.

기타등등

장만옥과 양조위를 직접 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 괜히 흥분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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