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그리고 행동하는 슬픔

연일 계속되는 반미 촛불시위 덕분에 양초업계는 특수를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양초업계가 영세한지 아닌지 잘 알지 못하지만, 문화일보에 소개된 기사를 보면 5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공장에서 2명의 아르바이트생까지 고용해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주문을 소화하기 힘들다고 한다. 지난 6월 티셔츠, 스티커 업계 호황에 이은 반짝 특수가 영세한 공장에 힘이 되었으면 한다.

반미시위가 막 피어오르던 11월 30일 토요일, 강남 메가박스에서는 유럽영화제가 열렸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미리 매진되어서 보고 싶은 영화를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운좋게 몇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중 <8명의 여인들>, <신과 함께 가라>, <피의 일요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1. <8명의 여인들>

프랑소아 오종은 국내에 갑자기 소개되었지만, 몇 년 전부터 국제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름이다. 미이케 다카시처럼 장르를 넘나들며 다작을 하는데, 주로 성에 관한 주제를 영화로 만드는데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를 에릭 로메르에 비견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마도 로메르처럼 야시꾸리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일테지만, 사실 로메르보다는 그 세밀함에 있어서 존 카사베테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둘 다 내밀한 주제의 영화를 만들지만, 로메르가 귓가에 속삭인다면 카사베테즈는 좀더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종은 <8명의 여인들>에서 8명의 프랑스 톱 스타를 다 불러내는 놀라운 캐스팅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장 이모우가 <영웅>에서, 그리고 스티븐 소더버그가 <오션스 일레븐>에서 했던 것 만큼이나 대담한 시도이다. 8명의 여인들은 실내극 같은 이 영화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살인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각 장면마다 배우들의 무게가 느껴진다.

사실 첫 장면에서 나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아마도 너무 프랑스적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대사들 후에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뮤지컬로 돌변하는 구성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귀에 익숙한 노래들은 살인사건을 유쾌한 크리스마스 축제로 만들고 있었다. 8명 저마다 모두 속물들이고 세속적으로 얽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면서도 이것이 단순 치정극이나 스릴러로 비치지 않는 것은 모두 밝은 조명과 뮤지컬 씬 때문이다.

<어둠 속의 댄서>와 한 번 비교해보자. 비요크가 애절하게 노래할 때 관객들은 춤과 드라마의 일치를 경험했다. 그러나, <8명의 여인들>에서 춤과 노래는 각 개인의 컴플렉스와 소망을 대변해줄 뿐 전체적인 드라마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가지 결말로 귀착된다. 아마도 이것은 후반부에 드라마가 뒤집히는 반전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영화가 반전됨으로써 그동안의 줄거리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보다 이 영화가 배우를 위한 영화인 탓이 클 것이다.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최대 관심사항이 되면서 사실 드라마는 양념처럼 러닝타임을 지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아빠에 대한 사랑, 외로운 여자의 고독, 남자를 유혹하는 법, 행복한 사랑에 대한 갈구 등을 노래하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결론 즉, 가정의 화목을 위한 것이면서 또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2. <신과 함께 가라>

17세기에 이단으로 몰려 카톨릭에서 추방당한 종파가 독일에 있다. 신도는 단 4명. 이들의 믿음을 지탱해 주고 있는 교구가 지병으로 쓰러지면서 유언을 남긴다. "이탈리아로 가라"

<신과 함께 가라>는 유쾌한 코미디다. 이단으로 몰렸던 이 종파의 신도 3명은 평생을 수도원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남자들. 이들이 여행을 위해 사회로 나오면서 일은 시작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 시골뜨기나 현대도시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그 편리함에 놀라면서도 결국 그 인간다움을 지켜가는 프랭크 카프라의 <디즈씨 뉴욕에 가다> 같은 종류의 이야기 말이다. <신과 함께 가라>는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종교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면에서 조금 다르다. 자연을 벗삼아 맑은 노래를 부르는 순수한 영혼이 타락한 교회를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와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모습은 현대인들에게 기분 좋은 안식을 줄 것이다.

<달마야 놀자>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나, 종교계에 충격을 주기 위해 기획된 많은 영화들 혹은 극장 안에서 '아멘'을 외치게 만드는 홍보영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따뜻함과 유쾌함이 이 영화 속에 있다. 저 대한민국 하늘을 붉은 십자가로 물들이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종교단체 권력자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영화이다.


3. <피의 일요일>

아마도 한국에서 아일랜드 사태를 잘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U2의 팬이기도 할 것이다. U2가 70년대 말 발표한 노래의 제목은 'Sunday Bloody Sunday,' 바로 1973년 북아일랜드의 IRA 유혈사태가 일어난 날을 기리는 노래다. 아일랜드 독립을 외치는 시민의 시위를 무력진압하고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태는 IRA의 존재를 전세계에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사건이기도 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던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그날의 상황을 짚어간다. 지역 하원의원은 시위를 평화적으로 이끌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결국 군의 발포로 무참히 짓밟히는 시민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오늘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지금부터 아일랜드의 모든 젊은이들은 IRA에 가입해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IRA가 무장해제한 지금도 여전히 크고 작은 유혈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북아일랜드는 영국인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의식으로 지금도 독립을 외치고 있다. <피의 일요일>은 적대의식이 최고조에 이른 어느 일요일에 대한 복원이자 슬픈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기억력의 한계와 망각에 대항해 방파제를 쌓으려는 어느 영화인의 노력의 산물이다. 우리의 반미시위가 들불처럼 번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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