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적 상상력으로 고대사 고증을?
- CG 등 후반작업 80% 마친 영화 <천년호>

위기에 처했을 때야말로 참사랑이 힘이 나타나는가.
하지만, 그것이 너무도 지독한 사랑일 때는..

신라 말기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과 천년호수의 저주를 그린 SF 무협 영화 <천년호>(이광훈 감독, 한맥영화 제작)가 17일 오후 4시 중앙극장에서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에서 천년의 시공을 넘나드는 연인의 사랑을 그린 바 있듯, '천년'은 영화 속에서 즐겨쓰는 시간장치이자 귀신으로 대표되는 민족의 샤머니즘을 대표하는 시간이다.

그 동안 <은행나무침대>를 제외하곤 <단적비연수><비천무><청풍명월> 등 국내 SF 무협 영화는 마치 괴담에라도 걸리듯 흥행에 참패를 했는데, 이 영화는 어떤 요소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시사회장을 찾았다.

상영전 무대 인사에서 영화 속 비하랑 역의 정준호는 "코미디 영화가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 충무로에 보석같은 영화가 될 것"이라며 영화를 소개하고 "영화같은 영화를 해보고 싶었고 자신의 대표작이 되길 바란다"며 감독 및 출연진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이어 진성여왕 역의 김혜리는 "약 10년만 스크린 컴백이라며 배우로 다시 태어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짧게 소개를 마쳤다.

영화는 주술을 신봉하는 아우타족의 개기일식 제례장면으로 시작한다. 시대는 기원전, 칼날 위에 선 아우타족의 주술사가 개기일식과 동시에 하늘 위로 뛰어오르자 박혁거세의 신라군은 주술사를 죽이고 부족들을 전멸시키고 그들이 신봉한 신목이 무너지면서 피와 원혼이 깃든 호수가 생긴다. 혁거세는 그 주술의 기운을 봉인하기 위해 호수 주변에 신검을 꽂는다.

아우타와 혁거세의 대결장면은 예고편에서는 볼 수 없던 화려한 영상미로 오래 전 SF 멜로영화 붐을 몰고 왔던 왕조현의 <천녀유혼>(1987)시리즈나 중성적인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던 임청하의 <동방불패> 등 80년대 말부터 홍콩 무협영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이후, 혁거세는 신라를 건국하게 되고 이로부터 천년의 부귀 영화를 누리던 신라는 과거 아우타족의 처지가 되어 피비린내나는 몰락의 길로 걷게 된다. 영화 속에서 위기일발의 신라를 지키는 비하랑(정준호)은 평민 출신의 자운비(김효진)를 사랑하며 진성여왕(김혜리)에 충성하는 무장이다.

영화는 비하랑보다 자운비의 감정선과 그녀가 지닌 사랑의 감정에 충실한 듯 보인다. 자운비는 혁거세에게 아우타족의 결계를 지키는 후손으로 길러져 아우타가 잠든 호수 근처에서 묘한(최원석)거사와 산다. 전원에서 한가롭게 보내는 자운비와 비하랑을 사랑하는 모습 그리고 악령이 씌워진 자운비 등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자운비의 비중은 매우 커 보인다.

자운비 역은 또래보다 성숙한 모습의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김효진에게 잘 부합된 듯하다. 영화 <비천무>(2000)에서 브라운관 스타 김희선은 스크린에서 서구적인 이미지를 벗지 못해 실패했던 것과 대조된다. 이 감독은 그녀를 왕조현의 우아한 맵시와 임청하의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으로 나타냈다. 그녀는 브라운관 스타답게 상반된 두 캐릭터를 오가며 고풍스런 자운비의 옷들을 무리없이 소화해냈다.

비하랑이 전쟁터로, 묘한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비하랑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간계에 의해 그의 연인 자운비에게 자객이 들고 도망을 가다가 그녀는 천년의 저주가 담긴 호수 앞에 다다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에 이른 그녀는 너무도 그를 사랑하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데.. 죽음보다 더한 저주, 저주보다 깊은 사랑의 시작을 예고한다.

신라에 대한 아우타의 원혼과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에 대한 복수가 힘을 더해 강력해진 자운비를 누가 막을 것인가. 영화 중반부터 자운비에 시선이 고정돼 아우타의 악령이 씌워진 자운비가 복수를 벌이며 멸망해가는 신라의 운명을 앞당긴다.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벌어지는 신라에 대한 아우타의 저주는 과거 <전설의 고향> 시리즈에 보았던 귀신 이상이다. 과연, 악령의 화신이 된 자운비를 막을 수 있을까.

자운비와 비하랑의 사랑은 아우타의 힘보다 더 큰 것일까. 영화 <천녀유혼>에서 인간 영채신은 섭소천을 사랑하며 그녀를 환생시키려 한다. 비하랑은 인간과 악령을 오가는 자운비의 모습에 가슴아파하며 개기일식이 지나기만 기다리지만 악령은 신라군을 향해 복수의 살육을 계속한다. 더 이상 자운비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비하랑은 결심을 하게 되는데..

"만약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장군님 손으로 저를 죽여 주세요"

<천년호>의 결말은 언뜻 <비천무>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 보다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준다. 악령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자운비와 그녀에게 칼을 내미는 비하랑, 비극의 역사 속에 엇갈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TV 사극을 통해 좋은 연기를 선보였던 김혜리는 당초 진성여왕 역으로 예정된 이미숙을 대신해 열연을 보였지만, 지나친 감정선으로 인해 여왕 본래의 캐릭터에 충실하지 못한다. 주연 배우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너무 많은 볼거리로 인해 관객의 감정 몰입에 방해가 된다. 또 다시 SF블록버스터 괴담이 재현되는 것일까..

영화 전반에 걸친 배경음악은 <은행나무 침대><초록물고기><쉬리> 등에서 음악을 담당한 이동준이 맡아 무협 환타지와 서정적 멜로에 걸맞는 영상음악들로 구성해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시사회 전 무대인사에서 이광훈 감독은 "오랜 제작 기간에도 불구하고 상영일 연기 등 사정으로 인해 아직 CG 등 편집과정이 진행중이며 시사회 상영판은 80% 가량이 진행된 것"이라는 양해의 말을 덧붙인 바, 영화 전반에 걸친 색감이나 구성 등 편집 등에 대한 평가는 개봉 후로 미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 <천년호>는 무협, 액션 등의 오락성을 곁들여 게임이나 영상물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고증해준다. 또한,우리 고대사 가운데 존재하는 수많은 설화 혹은 전설을 차용함으로써 영화적 상상력만 더해진다면 훌륭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많은 우리의 고대사들이 고증되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그 자체로도 한국 영화의 풍부한 토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하랑과 자운비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천년호>는 오는 11월 28일 개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