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이 끝난뒤 의식과 감정의 손아귀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마치 유령같은 영화를 본 것 같다. 최소한의 근접촬영, 최대한의 원거리와 장시간 촬영, 얌전빼는 카메라 워킹으로 스크린에 정주기가 쉽지 않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무대포처럼 한사람, 많아봤자 두사람의 인물에 집중하는것에 익숙한 나에게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 삼촌 등 무려 6명이나 되는 영화의 주인공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나마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처럼 옴니버스 식으로 한사람, 한사람의 이야기를 풀어가주면 좋으련만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각각의 주인공들의 모습들을 수없이 얽은 편집에 기가 질린다. 가족 구성원 서로간의 갈등이나 사랑같은 팀플레이가 아닌 남미축구를 연상케하는 지독한 개인 플레이로 일관하는 서사구조에 그 의미를 파악코자 하는 의지가 사라져 버린다. 한마디로 쉽게 읽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흠흠.

에드워드 양 감독이 정말 징글징글하다. 헐리우드식 영화 스타일은 나도 어지간히 질렸기에 양감독의 영화 스타일은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초면에 3시간은 너무 심했다. 하지만 어찌하랴, 아웃사이더를 향한 애정을 가지려면 이런 고생은 당연한 거라고 해두자. 양감독은 후 샤오시엔 감독과 더불어 대만 박스 오피스의 2대 독약으로 일컬어 진다는 소문에 조금씩 그의 영화에 대한 불만이 호감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웬지 양감독에게선 맘에 드는 작품이 나오지 않자 몽둥이로 사정없이 구워낸 도자기를 깨뜨려버리는 그런 꼬장꼬장한 장인의 기질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시류에 영합하지 않음은 기본이겠구.. 게다가 이 영화의 자본을 대만으로부터는 지원받지 못하고 일본으로부터 받았다는 이야기도 그렇구 말이지. 왜 그리 일관성 없이 변덕스럽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냐 천성적으로 주류보단 비주류를 더 좋아하는 걸.. 후후. 그래 이쯤에서 나의 앎과 삶의 깊이가 양감독과 비교해 천지차이임을 고백하고 어설프나마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간단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 영화를 단 하나의 주제 "시작"에다가 모든 것을 갖다 맞출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한다. 어차피 영화가 하나의 텍스트이고 관객들마다 읽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각양각색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원래는 제목 "하나 그리고 둘"이 주역의 기본괘인 "-"과 "--"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영화는 삶의 희비와 옳고 그름, 밝고 어두운 면을 다룬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영화를 본즉 나의 생각과는 좀 다른 것 같고, 결정적으로 원제인 "- -(일일)"은 시작을 뜻하며 영제인 "a one and a two"는 노래를 시작할때 말하는 관용어라는 감독의 인용을 보면서 그럼 시작이라는 의미가 영화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들 양양은 초등학생으로 골때리는 괴짜녀석이다. 사람들이 각각 사물의 일면을 보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는 카메라를 들고서 사람들의 뒤통수나, 다양한 사물들을 필름에 담는 행위와 말들은 심지어 철학적이다. 수영을 보고서는 세면대에 물을 받아 머리를 박고 숨을 참는 연습을 하고는 어느날 옷을 입은체 수영장으로 뛰어드는 행동, 교내 극장의 스크린위에 비친 여자친구의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녀석의 눈을 보면 이제 막 세상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인식작용이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반면 딸 정정은 청순한 고등학생으로 세상을 보고 만지고 체험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 관계를 통해 무언가를 시작한다. 이웃집 친구 리리와 그녀의 남자친구 뚱보와의 사랑, 우정을 경험하며 상처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메카니즘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알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양양에게서는 그 시작이 무한한 생명력과 희망으로 느껴지는 반면, 정정에게서는 깊은 인생으로 막 다가서려는 순간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럼, 이미 알것은 다 알아버린 것 같은 중연의 아버지 NJ와 어머니 밍밍의 삶에서는 어떤 의미의 시작이 있을까? 민민은 뇌출혈로 쓰러진 할머니를 위해 대화치료를 하는 중에 할머니에게 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매일 똑 같으며 별볼일없다는 것에 절망을 하고 산속의 절로 들어가버린다. 직장여성이자 어머니로 살아온 한평생이 부질없다는 생각은 의식의 변화, 깨달음을 통해 어느때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본다.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NJ이에게 있어 시작은 어떤 모습일까?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되짚어보는 지극히 사려깊고 오버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첫사랑과의 석연치 않은 관계를 차근차근 정리해내고, 오로지 이윤만을 좇아 행하는 직장생활을 청산하는 그것인데, 과거와 현재에 쌓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또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초가 되는게 아닐까?

삼촌과 할머니는 인생의 시작과 시작아닌 시작을 행위하는 인물들이다. 삼촌은 결혼식으로 제 2의 인생을 영화 첫장면으로 장식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할머니는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장례식의 주인공으로 영화의 마지막을 배역을 수행한다. 불교의 윤회에 입각해서 삶을 바라본다면 할머니는 죽음으로써 또다른 삶을 시작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삶의 중층구조에서 본 시작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얼까? 아쉽지만 잘 모르겠다. 억지로 꿰어맞추어 영화를 이해하려고 한 탓이 크리라. 하지만, 긍정적으로 본다면 삶이란 것이 10대건, 40대건, 죽음을 앞둔 시기이건 간에 늘 새로운 것을 꿈꾸며 시도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건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이 삶의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제작비를 일본이 지원한 사실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극중에서 일본 기업인 오타와의 관계자가 술자리에서 내뱉은 말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고 본다. "왜 우린 처음을 두려워하지요? 하루하루가 그날로선 처음이고 날마다 새롭죠. 똑같은 날을 두번 살지 않는데 아침에 깨는 걸 두려워하지 않죠.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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