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니 다코]는 정신분열증으로 위장한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아니, 그 반대가 더 맞을지도 모르죠.

영화는 SF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시간 고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인 도니 다코는 어느 날 밤, 정체불명의 토끼 인간한테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언을 듣고 근처 골프장에서 잠이 드는데, 바로 그날 밤 하늘에서 제트기의 엔진이 떨어져 그의 방을 박살냅니다.

영화는 그 때문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도니 다코가 세상 멸망까지 28일동안 겪는 일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 토끼 인간의 악몽에 시달리고, 그의 명령을 받아 상수도를 터뜨리거나 동네 유명인사의 집에 불을 지르고, 시간 여행의 비밀을 풀려 애를 쓰고, 새로 이사한 그레첸이라는 학생과 데이트를 합니다. 그러다 28일이 지나면 영화는 시간 고리를 닫기 시작합니다. 도니 다코에게 두번째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여기서부터지요.

아까 이 영화가 시간 여행물이라고 했습니다만, 이 작품을 순수한 SF로 본다면 여러가지로 실망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에 필수적인 논리적 설명과 같은 것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우린 대충 일련의 암시들만 볼 수 있을 뿐이며, 그것들도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도니 다코의 행동 역시 SF 장르 주인공들의 문제 풀이식 모험과는 다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도니 다코라는 주인공 자체입니다. 얼핏보면 중산층 가족 출신의 평범한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비정상적으로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가 타고난 반항아라서? 아뇨, 아마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도니 다코]는 반전 도형과 같은 영화입니다. 시간 여행 모험담과 정신분열증 이야기 모두가 통하죠. 그 중에서 정신분열증 이야기쪽이 더 앞뒤가 잘 맞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SF적 설정은 빈약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영화는 이 약간 맛이 간 젊은이를 프리즘으로 이용해 통해 80년대 말의 레이건 시대를 다시 돌이켜봅니다. 이 영화의 작가/감독인 리처드 켈리는 75년생이니 도니 다코보다는 어립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 나이면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인 1988년의 미국을 무리 없이 이죽거릴 정도는 되지요. 켈리의 이죽거림은 영리하고 냉소적인 틴에이저가 어른들을 놀려대는 정도지만, 도니 다코의 미치광이 관점이 사이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다코의 이야기는 마치 마약을 먹고 꾼 악몽과 죽음 직전에 사람들이 겪는다는 환각의 중간쯤에 위치합니다. 켈리는 지옥에서 온 하비라고 할 수 있는 토끼 인간 프랭크에서부터 하늘에서 떨어지는 제트 엔진에 이르기까지 근사한 초현실적인 요소들을 그가 지겹게 회상하는 80년대를 신나게 때려부수는 망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니 다코의 정신나간 광증을 훌륭하게 연기해낸 제이크 질렌홀도 그런 망치들 중 하나고요.

결과는 상당히 인상적입니다만... 그 이상 나가지는 못합니다. [도니 다코]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은 영화지만 분명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켈리가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흐렸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야기할 내용 자체가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도니 다코]는 훌륭한 구경거리지만 훌륭한 영화가 되려면 조금 더 가야하는 작품입니다.

기타등등

드류 배리모어가 제작자로 나선 작품입니다. 이 사람이 조역을 맡은 것도 일종의 찬조 출연에 가깝죠. 도니의 누나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매기 질렌홀은 제이크 질렌홀의 진짜 누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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