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주가 폭락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노숙자로 주저앉은 펀드 매니저 석원과 게이 노숙자인 대식은 서울역에서 비비다가 남쪽으로 긴 여행길을 떠나는데, 중간에 대식을 짝사랑하게 된 일주가 이들의 팀에 가세합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7,80년대 한국 로드 무비에 가깝습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라는 세트도 그렇고, 이들의 구질구질한 상황이나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도 그렇고요. 단지 영화는 이들의 선배들보다 조금 더 어두운 편입니다. 이 영화에는 고래도 없고 삼포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움직입니다. 그러고 있으면 마음 속의 아픔이 조금 가라앉을 것처럼 말이에요.

영화의 형식이 한국 로드 무비 풍이라면, 내용과 인물 설정은 50년대 미국 게이 펄프 소설에서 가져온 듯 합니다. 이성애자인 남자를 짝사랑하는 게이 남자와 그 게이 남자를 짝사랑하는 패그 해그까지 하나 붙었으니 완벽한 콤보 세트인 셈이죠. 이런 소설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스토리 전개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독인 김인식이 이런 소설들을 마스터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원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들은 이전에 장르화되어 있기 마련이지요.

[로드무비]는 좋은 영화일까요? 인상적인 영화인 건 사실입니다. 힘있는 영화인 것도 사실이고요. 거칠거칠하면서도 강렬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것도 사실이죠. 대식, 석원, 일주의 이야기는 소통의 단절과 사랑의 어려움에 대한 상당히 효율적인 은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가 받아들인 한국식 로드 무비의 장르도 영화 내에 잘 녹아든 편이고요. 노숙자들의 삶을 다룬 초반부도 강렬합니다. 가끔 [퐁네프의 연인들]이 생각나서 탈이지만요.

하지만 드디어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한국 주류 영화가 나왔다고 기대에 부푼 관객들에게 [로드무비]는 상당히 짜증나는 영화입니다. 배우들이 몸을 던져 연기한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섹스신들은 동성애자 관객들을 고려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성애자 관객들에게 쇼크를 주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입니다. 캐릭터의 설정들 역시 너무 고정되어 있고 그 상황도 너무 극단적이어서 결코 좋게 봐줄 수가 없군요. 그 극단적인 설정이 이미 거의 장르화되다시피한 진부함으로 흘러가, 익숙한 관객들에게 자극보다는 권태와 짜증을 제공하게 된다는 것도 문제고요. 게다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변명조의 분위기와 봐주는 듯한 설정들은... '감정의 단절과 뼈아픈 사랑의 은유로서의 동성애'는 이미 동성애자 관객들에겐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한두번이면 모를까, 너무 많이 봤거든요.

문제는 이런 식의 진부함에 대한 비판이 개별 영화의 비판으로는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로드무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뭐, 질만 따진다면 상당히 괜찮은 영화니까 한 번 확인하셔도 될 듯 하군요. 하지만 위 문단의 경고는 잊지 마시길.

기타등등

심의를 우려했다지만, 이 정도의 섹스신은 이성애 장면에 비하면 비교적 온화한 편이잖아요. 하긴 늘 이중 잣대는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내 의견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