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에서 가장 놀라운 반전은 이 영화가 너무나도 전형적인 외계인 침략 영화의 줄거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뿌리는 외계인 침략물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허버트 조지 웰즈의 [우주 전쟁]에 직접적으로 닿아있습니다.두 작품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유사점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극중 인물 메릴이 중간에 이 작품을 언급하기도 하죠.

샤말란이 외계인 침략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하는 도구들 역시 새롭게 개발된 게 아닙니다. 아니, 새로운 게 뭐예요. 샤말란은 크롭 서클이나 피닉스 UFO 소동처럼 이미 잘 알려지고 자주 토론되는 사건들을 별다른 가공 없이 그대로 가져와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연결하는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그냥 외계인 침략물입니다. 외계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 갑자기 우르르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나 이 영화를 전형적인 외계인 침략 영화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엔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이질적이니까요. 이 영화엔 그 흔한 외계인 우주선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빠, 삼촌, 두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이 의미있는 등장인물들의 전부이며, 무대도 필라델피아 외곽의 작은 마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액션의 대부분은 주인공들이 사는 집에서 일어나고요. 이런 면에서 [싸인]은 [식스 센스]보다 [언브레이커블]에 가깝습니다. 픽션 세계에서는 흔해 빠졌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펜실베니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영화는 그걸 아주 현실적이고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이죠. [언브레이커블]에서처럼 [싸인]의 예술적 등뼈도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세계의 대조에 있습니다.

[언브레이커블]이 그랬던 것처럼, [싸인]도 심각한 영화입니다. 설정 자체가 무뚝뚝한 농담 같았던 [언브레이커블]보다 더 심각하죠. [싸인]은 순수한 공포 영화입니다. 세 편의 '샤말란 영화들' 중 가장 유머가 풍부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 유머가 설정의 어처구니없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반응에서 나오기 때문에 순수성이 크게 손상되지는 않습니다.

영화 속의 외계인들의 묘사도 그런 순수함을 뒷받침해줍니다. 이 영화의 외계인들은 단 한 번도 '구체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순전히 편집증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존재합니다. 크롭 서클과 피닉스식 UFO 목격담처럼 노골적인 UFO 전설의 요소들이 주를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영화는 외계인들의 정체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을 자극하는 현상들뿐이지요. 사실 영화 속에서는 외계인이라는 단어도 아주 제한적으로만 사용됩니다 (그런 면에서 '외계인'을 남발하는 우리말 자막은 원래의 의도를 망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알 수 없는 현상과 타자에 대한 우리들의 공포심입니다.

이런 공포를 묘사하는 데 샤말란이 동원하는 방식 중 아주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바람에 불길하게 흔들리는 풍경에서부터 돌아가는 문 손잡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장르 안에서 확고하게 구축된 도구들이죠. 하지만 샤말란은 이와 같은 도구들을, 거의 거장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지고 신중하고 정확하게 해치웠습니다. 그는 문 뒤에 있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부러 관객들의 공포를 자극하기 위해 쇼크 요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죠. 다소 아이러니컬하지만 그의 테크닉 일부는 [식스 센스] 개봉 당시 그의 경쟁자였던 [블레어 윗치]와 상당히 닮아있기도 합니다.

[싸인]은 공포 영화지만 그만큼이나 분명한 멜로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매우 샤말란답습니다. 그는 공포를 자극하기 위해 멜로드라마를 희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 사이의 감정과, 신앙을 잃은 전직 성직자의 고뇌입니다. 외계인 침략은 이런 이들의 드라마에 해결책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죠. 주인공 전직 성직자가 믿음을 되찾는 것은 순전히 이런 수난을 겪은 뒤니까요. 그렇다고 이 영화를 기독교적인 영화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션 스쿨을 다닌 힌두교도가 만든 영화답게 분명한 종교적 교리대신 영적 깨달음에 더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요.

이 두 장르를 결합하기 위해 샤말란이 동원한 트릭에 동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영화엔 헛점이 꽤 많은 편입니다. 구성상의 결함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효과가 불확실한 결합을 일단 밀어붙이고 본 샤말란의 선택이 더 문제죠. 기존 UFO 현상의 도입은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얄팍해질 가능성도 큽니다. 일련의 필연적 우연 속에서 절대자의 흔적을 찾는 시도는 울림이 큰 결말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의심되기도 합니다. 적어도 [싸인]은 [식스 센스]처럼 분명한 결말을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관객들의 반응도 그렇게 일괄적이지는 못하고요.

그러나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싸인]은 여전히 음미할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적어도 시간에 쫓기는 일 없이 느긋하지만 효과적으로 서스펜스를 쌓아가는 샤말란의 테크닉은 여전히 존중될 가치가 있습니다. 두 명의 아역 배우들을 포함한 네 주연 배우들의 훌륭한 앙상블 역시 샤말란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배우들을 다루는 감독인지 증명하는 예입니다. [싸인]이 [식스 센스]처럼 엄청난 문화 현상이 되는 일은 없겠지만, 샤말란은 이 영화를 통해 자기가 여전히 믿을만한 감독이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했습니다.

기타등등

원래는 마크 루팔로가 메릴을 연기할 예정이었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호아퀸 피닉스에게 돌아갔다지만요. 피닉스도 어울리니 문제는 없었겠지만 루팔로와 로리 컬킨의 재회를 봤어도 재미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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