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영화시장에서 배우만큼이나 인기있는 영화인은 영화감독인 것이다. 그러나, 작가주의는 예술지향적인 것이며, 동시에 부르조아적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그에 대한 학문적인 이해가 절실함을 인류가 인식하게 된 것은 40년정도밖에 안된다. 그리고 이제 덴마크로부터 온 일단의 감독들이 기세등등하게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도, 그러한 집단의 중심인물인 라스 폰 트리에는 예술영화의 메카인 칸이 지금 현재 가장 사랑하는 영화청년이다. 100년도 안되는 기간속에서 영화가 순식간에 모더니즘으로 진입한 것은 놀라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토록 많은 영화만들기의 컨벤션속에서 헤엄쳐야만 하는 20세기말의 영화감독들에게 있어서 영화제작과 창작에 있어서 존재하는 수많은 규칙과 관습들은 무거운 짐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이미 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라스 폰 트리에는 <유로파>에서 보여주었고, 그래서 그는 다른 길을 찾는다.

라스 폰 트리에가 98년에 만든 <백치들>은 도그마의 규칙에 따라 그가 만든 첫 번째 영화이다.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셀레브레이션the Celebration>과 함께 98년 칸에 입성했던 그의 영화 <백치들>은 [Sight and Sound]에서는 [Fuck you-cinema]로 분류할 만큼 나레티브와 영화적 형식에서 전복적이다.(Richard Falcon이 [Sight and sound]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백치들>을 프랑소와 오종의 <시트콤>과 가스파 노에의 <아이 스탠드 얼론>과 함께 부르조아지에 대한 조롱을 위해 제작된 [퍽큐시네마]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그러한 그의 관점은 <백치들>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적나라함에 주목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의 의도와 표면적으로는 일치하는 것이다.) 인과관계가 무시되고, 카메라 워킹의 모든 관습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는 자신이 담고 있는 백치들처럼 이제까지의 영화적 관습에 대해 철저하게 백치가 되고자 한다. 그는 <유로파>에서 자신이 보여주었던 현란한 기교의 극단에서 다시 한번 그의 영화적 현란함을 과시한다. 알고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작가주의의 상황을 타파하고자 한다.

어쩌면 그의 문제의식은 그의 도그마선언이 담고 있는 내용만큼 순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그마95]의 원칙들을 살펴보면 마치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리얼리즘에 대한, 영화매체가 담을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믿음을 도그마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은 네오리얼리즘과 도그마는 너무나 정반대의 고민에서 출발해서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이 현실에 대한 진지함에서 출발했다면, 도그마는 현실에 대한 조롱과 비판에서 출발한다. 라스 폰 트리에가 <백치들>에서 조롱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브루조아지의 썩어빠진 타락과 위선만이 아니라, 사회와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컨벤션들이다. 결코 현실속에서는 바보일 수 없는 소토퍼일행의 선택은 자신의 영화를 찍으면서도 영화적 컨벤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선택이다. 그는 칸이 가장 총애하는 영화천재이고, 그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탈출구로 선택한 아방가르드의 고민의 결과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만으로 현실에 필름위에 빨려들어온다는 믿음을 가진 이는 없다. 라스 폰 트리에는 자연조명을 사용하고, 동시녹음을 고집하기 위해 하모니카를 불면서 디지털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다. Fix된 카메라 워킹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shot들은 언제나 먼산을 바라보듯 피사체를 놓치곤 한다.

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백치들>의 목표는 모든 통제와 컨벤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에게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예술지향적이며 작가주의의 극단으로 향하는 유럽영화속에서 삶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영화가 결코 삶과 괴리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켄 로치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있는 주제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근본적으로 [작가주의]를 살리기 위해서 [작가주의]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영화천재이다. 따라서 <백치들>은 네오리얼리즘의 원칙으로 제작되었음에도 진실보다는 조롱과 전복적인 화면들이 가득하다. <빌리지보이스>에서 말한 것처럼 네오리얼리즘과 도그마의 차이가 배우의 출현여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양자 모두 현실을 직시하지만, 도그마는 현실을 조롱하고 부르조아를 비웃기에 바쁘다.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조차도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멸시해 마지않는 부르조아지의 일부이며,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독설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는 <백치들>에서 부르조아와 프티부르조아까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자신까지도 끊임없이 조롱한다. 라스 폰 트리에가 주류에 편입되지 않고, 칸이 거부하는 반골이었다면, 그가 황금종려상을 땅바닥에 내팽게치고 침을 뱉었다면, <백치들>은 여전히 살아숨쉬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카메라맨이 카메라에 잡히고, 초점이 나가고, 인과관계가 무시되는 의도되지 않은 점프컷과 편집연결등은 반골의 것이 아니라 작가주의의 적자로서의 라스 폰 트리에의 것이며, 작가주의의 끝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그 자신의 고민의 아방가르드적 결과물이다. 부르조아를 조롱하지만, 찡그린 듯 웃으면서 부르조아의 하나가 되는 라스 폰 트리에는 리얼리즘을 탈출구로 선택한 모더니즘의 첨단에 선 인물이다. <백치들>에서 집단난교나 바보행위의 심리적 쇼킹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은 없다. 그것은 부르조아지를 비웃는 행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반성이라기 보다는 독설에 가까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영화는 늘 기존의 관습에 대한 전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칸이 1960년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놓치지 않았듯이 라스 폰 트리에에 대한 애정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러한 전통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듯이 보인다. 누벨바그에서 시작된 [작가주의]가 바쟁의 적자로서 네오리얼리즘에 뿌리를 대고 있듯이 [작가주의]의 적자인 도그마 또한 다시한번 리얼리즘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그마의 등장은 다큐와 픽션의 구분만큼이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논쟁 또한 전혀 다른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 <유로파>, <킹덤>의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칸느에 가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그 바보들은 열흘 동안 영화를 무더기로 본 다음 제비뽑기로 영화 수상작 명단을 발표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예술가 시장터에 들어서서 살의를 느꼈을 바로 그런 기분에 시달린다. 올해도 어떤 바보가 상을 받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좋아할 것이다. 나는 그 상을 준 다음 웃고 있는 인간들의 명단을 불러줄 수 있다. 하지만 명예훼손이 될 수 있으니 별명을 대신 부르겠다. 바보/멍청이/사기꾼/도둑놈...

- <유로파>로 황금종려상에 실패한 직후에 한 라스 폰 트리에의 인터뷰 (From [K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