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마들렌>의 시사회장, 한 쪽으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들었습니다. 주인공인 조인성이나 신민아가 왔겠거니 하고 있는데. 왠 걸, 홍보사에서 준비한 빵, '마들렌'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이었죠. 마들렌(madeleine).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에게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줬다는 그 빵의 이름이죠. 말만 들었지 '마들렌'을 먹어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맛이 어땠냐구요? 음, 달걀과 버터를 많이 넣어 가볍고 부드러운 일종의 카스텔라였습니다. 그냥 좀 달아서, 딱딱하고 담백한 빵을 좋아하는 제 입맛엔 맞지 않았구요.

영화를 보기 전, 갓 구어낸 빵과 신선한 우유처럼 기분 좋은 영화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객석에 불이 꺼진 조금 뒤부터였죠. 영화의 도입부, 주인공 지석(조인성)의 옥탑방이 스케치 됩니다. 무수히 꽂혀진 책만으로도 그가 국문학도이거나,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죠. 하지만 가만히 꽂혀진 책을 보니, 이런! 신동아와 월간조선이군요. 세심하지 못한 감독의 손길. 왠지 부실한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을 현실적으로 그렸다는 이 영화는 특별한 매력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예쁘게만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파나비젼 카메라가 사용돼 그 빛을 더했다고 하는데, 일반 관객인 저는 차이도 잘 모르겠고, 빗 속에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나 함께 신문배달을 하는 설정도 이젠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사회적 통념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남자는 보수적이고, 똑똑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반면 여자는 자유분방하고 공부엔 뜻이 없어 일찌감치 헤어 디자이너의 길을 택했습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취미부터 습관까지 모든 게 정반대입니다. 이들 커플은 흔히 말하는 공대생과 미대생, 법대생과 음대생으로 상징되는 적당히 계산된 커플의 한 예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물론 일상은 '쿨'하게 그려져야 하기 때문에 남루한 일상을 보여주는 의식주에 대한 걱정은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줄만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얼마간 진행된 뒤, 영화는 결정타를 날립니다. 바로 주인공 희진(신민아)의 임신 사실이죠. 아, 왜 자꾸만 영화들은 여자들을 임신시키고 낙태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순수한 남자의 사랑을 강조하려는 걸까요. 남성이 지닌 양면성을 통해 면죄부를 얻고 싶은 심리가 깔려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요즘 젊은이들의 신세대적인 사랑은 과거의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이런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남성 감독이 여성에 대해 갖는 시선의 한계일까요. 영화 속에서 일을 저지른 사람도 일을 수습하는 사람도 결국은 남성입니다. 주인공 희진이 당차고 자신의 일을 똑 부러지게 한다 싶지만, 결국 '여성'이라는 객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희진은 립스틱을 보면서 자신도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이 립스틱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마들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겠죠. 이 설정을 통해 영화는 이들의 사랑이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깨달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건 바로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순도 100%의 사랑이란, 남녀가 한 여관방에 있어도 손만 잡고 자는 것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남성들의 진리'인 것이죠.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선 재료의 비율이 중요합니다. 적당량의 밀가루와 달걀, 버터와 설탕이 들어가야 하죠. 어느 하나가 더 들어가거나 덜 들어가면 빵이 딱딱해지거나 부서지기 쉬우니까요. 그런데 <마들렌>엔 설탕을 너무 많이 들어갔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달콤하지 않은데, 자꾸 달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까닭이겠죠. 우리의 사랑이 그저 달콤하기란, 더구나 쿨하기까지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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