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행제로

-<남자태어나다>로 시작하여 <몽정기>, 그리고 <품행제로>에 이르는 80년대 자화상-

12월 16일 월요일 1시30분 종로에 위치한 시네코아 2관에서는 최근 TV를 통해 인기를 더 모으고 있는 류승범씨와 무표정 CF스타 TTL소녀 임은경양, <철파태>로 스크린 입지를 굳히고 있는 공효진 주연의 <품행제로> 언론시사회가 열렸다. 꾸물꾸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취재진들이 자리를 채웠다. 영화 <품행제로>는 9월초부터 각 극장별로 <품행제로> 매거진을 배포하면서 마케팅전략과 홍보에 신경을 남달리 기울였다. 그만큼 어떤 영화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덕고의 쌈장인 중필, 정란여고의 퀸카 민희, 중필을 짝사랑하는 오공주파의 나영, 그리고 중필을 대적하는 실력파(?) 전학생 상만과의 불꽃튀기는 접전을 미묘한 사랑과 결합시켜 코미디화 시킨 작품이다. 영화를 보면서 지루함 없이 나름대로 90분이 지나간다. 90년대 초반, 고등학교 폭력집단을 소재로 만든 일본만화가 한때 우리 나라에 붐을 일으킨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슬램덩크> 같은 작품은 소장본으로 다시 출간하여 인기를 여전히 모으고 있지만 서도 조폭과도 같은 고등학생집단이 폭력으로 일관하는 점철된 사무라이 정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나라 중 고등학생들에게 일본만화를 보면서 영웅주의에 목말라있는 그들의 갈증을 씻겨준 것이 기억난다.

이번 <품행제로>는 물론 일본만화를 바탕으로 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일본고등학교폭력집단을 소재로 한 일본만화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고등학교의 짱인 중필을 중심으로 마치 <야인시대>의 오야붕인 김두환과도 같은 정신적 지주로 존재하고 있다. 대학생 못지 않은 몇 번의 휴학을 거쳐 그는 이미 전설적인 소재로 동생과도 같은 동급학생들에게 무용담 꺼리로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 달리 말하면 똘마니 또한 등장한다. 거기에 짱 중필은 모범생 여학생을 사랑하고 그를 지켜보는 오공주파의 나영도 교묘하게 삼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로맨스를 삽입시킨다. 거기에 좀더 남성적인 이미지가 후반부에 삽입시켜 진정한 짱을 가르는 결투신도 빠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나름대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1986-1987년도를 기점으로
당시의 고등학생을 사실성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롤러 스케이트장의 등장, 김승진의 <스잔>팬과 박혜성의 <경아>팬으로 나눠지는 여자고등학생 팬클럽, 만화주인공을 사실성 있게 그리는 학생을 이용해 음란한 만화를 만들어 돈을 삥 뜯는 불량학생, 캬바레와도 같은 나이트클럽, 클래식기타나 통기타를 배우는 교습소, CD가 아닌 백판을 팔고 있는 레코드점, 교련복을 입고 화생방훈련을 받고 있는 학생,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테 등 당시 고등학생들의 모습과 환경을 사실성 있게 그려 나름대로 386세대들에게 추억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배역선정도 제대로 이루어진 점에서 영화가 지루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다. 짱 중필을 맡은 류승범의 연기도 실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성 있게 연기했다. 형인 류승완 감독의 연기지도 도움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타 작품에서 그다지 대사가 많지 않았던 임은경도 이번 작품에서는 연기의 소질이 엿보이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감초 같은 오공주파의 공효진, 중필의 영원한 똘마니 봉태규의 연기가 한몫을 더해 영화를 빛나게 한다.

조폭 영화의 시두인 <친구>도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영화 <품행제로>를 그와 같은 쌈마이 영화로 취급하고는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불량스러움은 자유와 순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미화하고 교육을 등한시한다는 점이 아닌 그들만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추구하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량함에 선과 악이 존재 한다기 보다는 그 불량함에는 결코 악은 없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음..그래...맞아! 저 때 저런 것이 있었지!"라는 말이 관람석에서 나오는 것은 추억에서 근거하는 것이다. 우등생이든 열등생이든 지금과는 달리 그 때만큼은 좀더 순수했다는 것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두사부일체>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고등교육의 현실적 모습이 이번 작품 <품행제로>를 통해 반성되고, 통찰되는 것이다. 80ssu대말 중학생들의 성적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몽정기>를 비롯해서 이번 작품에서도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마도 80년대의 추억이 지금의 현실보다 행복하다는 근거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