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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만세 (1994, Vive L'Amour)
대만 / 대만어 / 드라마, 예술, 퀴어 / 113분 18세관람가 / 1995년 12월 01일 개봉


출연: 양귀매, 이강생, 진소영
감독: 차이 밍량
각본:
촬영:
제작: 중앙전영공사
배급: 동아수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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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성  (9/10)
대중성  (4/10)
네티즌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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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만세> 아무하고도 소통할 수가 없다 (8/10)

글: 김윤경
2003년 03월 24일

조회: 7373

핸드폰으로 대변될 수 있는 현대인의 소통매체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지요. 부재중 전화 서비스, 매너콜 서비스, 게다가 이제는 위치추적까지 가능하다니! 신이시여 정녕 이러고도 우리가 외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개의 현대인은 중증 고독장애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나요. 저 도도한 과학의 비약적 발전 속에서 우리가 취한 것은 핸드폰의(인간이 아닌) 노예로서 전락한 기이한 처지지요. 사적인 고백을 하자면 저는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십니다. 어디서든 1초간 꾹, 누르면 ‘여보세용’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첨단과학문명이 내 손안에 쥐여있는데도 말이죠.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거라구요? 올바른 지적입니다. 현대인의 핸드폰은 곧 인간성 상실과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마치 진정한 단 하나의 사람을 소유하지 못해 팔랑개비가 되어버린 카사노순, 카사노바들처럼 말이죠.

차이 밍량의 <애정만세>는 1994년에 만들어진 영화로서, 대만의 상황을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기록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 편의 영화 속에서 대만이라는 나라의 현재성, 그곳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정서를 ‘경험한 듯한’ 착각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지요. 이는 곧 대만뿐만 아니라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를 추진한 한국의 상황과도 일치하며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미학적 성취와 함께 그려낸 수작이지요. <애정만세>는 현대인이 얻은 것과 잃은 것 중에서도 ‘잃은 것’에 대해 비정상적인 소통형식과 소리를 극도로 배제시킨 침묵의 언어로 다소 극단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세 명의 직업은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불안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지요. 부동산 중개업자 메이와 납골당 판매원인 소강, 그리고 거리의 노점상인 아정은 소속감 없는 공허한 상태로서 교류의 끈 없이 살아가는 허허로운 삶입니다. 이들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은 주인 없는 아파트지요. 아파트라는 공간감이 내던지는 것은 온기를 내뿜는 스위트홈이 아니라 다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부재중’, ‘대기중’의 상태일 뿐입니다. 이 곳에서 비정상적으로 소통하며(낯선 타인과의 섹스) 허기진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은 메이가 자신의 냉장고 속에 처박힌 케잌을 먹으며 눈물을 터트리는 장면과 오버랩 됩니다. 식욕과 성욕의 해결이 정서적 측면을 동반하지 못한 채 본능적인 단계에서만 머무는 이들의 삶은 개개인의 처한 경제적 상황과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특히 소강의 성정체성에까지 확대되기에 이르죠. 여자의 옷을 입어보며, 수박을 볼링공 구르듯 내던지는 소강의 낯선 행위는 소통의 막막함을 표면화시키고 있습니다. 기이한 복장의 펑크족의 출현이 ‘날 좀 봐달란 말야’로 대변되는 외로움의 표출이었듯이 소강은 또 하나의 소외된 집단을 말하고 있지요.

‘거리두기의 미학’을 몸소 실천하려 바둥거리는 현대인의 속성은 전 후 몇 년간 독보적인 빛을 발한 ‘냉소’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단어가 가진 득과 실의 면면을 따져보며 관계망 속에서 줄다리기를 하느라 지치고 지쳤을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는 암묵적으로 수치화되고 있으며 심지어 도식화되니 소통은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래뵈도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데 말이죠. <애정만세>의 라스트 신에서 보여주는 7분여간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 그것이 유일한 인간적인 소통일 것입니다. 부동산 중개업자 메이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공원에서 7분간 울어댑니다. 차이 밍량은 이것을 온전히,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조차도 명백히 혼자가 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폭로합니다. 낯선 할아버지의 등장은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 놓인 인간의 카오스를 드러내지요. 고독에도, 소통에도 겁을 집어먹는 우리네의 속성이 대만의 1994년 타이페이의 세 젊은이들을 통하여 말해지고 있는 셈이지요. 한국의 2003년, 어느 한적한 공원에서도 메이와 소강, 그리고 아정의 외로움이 거취하고 있을 겁니다.

이러고 보니, 현대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대담하고 현명한 용기란 ‘혼자가, 혼자가, 혼자가 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이 페시미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군요. <어바웃 어 보이>의 ‘사람은 섬이 아니다’라는 교훈적 메시지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울컥, ‘나도 교류하고 말테야’ 휴머니즘적 감성을 자극하지만 왜, 그런 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걸까요. 그러한 이유로 나는 <애정만세>가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이 삶의 무게를 경감시킬 수 있다면 나는 차라리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티>를 다시 보겠습니다. 덧붙혀, <애정만세>를 권유하면 지루하다며 손사래를 치는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독이란 참으로 지루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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